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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5-01-02 09:53:19 댓글: '0' ,  조회 수: '4544'
*** 2015년 「생활성서」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

 

 

 

예수님 걸음에 맞추라는 말

 

 

6년 전 나는 동료들과 함께 칠레로 파견되었습니다. 처음에는 그저 행복하기만 했습니다. 외국에서 만난 사람들의 모습, 행동, 풍경 하나하나가 새롭고 신선했습니다. 그리고 나도 여기저기서 보고 들었던 것처럼, 헌신적이고 열정적인 멋진 선교사로 살아가리라 다짐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그 새로움들이 서서히 평범한 일상으로 바뀌면서부터 내 안에서 일어나는 작은 소용돌이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한국사람 특유의 ‘경쟁심’이었습니다. 굳이 앞서나가고 싶은 욕심은 아니었지만, 최소한 뒤처지고 싶지는 않은 일종의 불안감. 일터와 가진 것 모두를 정리하고 선교사가 되어 그 먼 곳까지 간 마당에 도대체 앞서가는 것은 무엇이며 뒤처지는 것은 또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여하튼 그러했습니다.

 

특히 언어공부가 시작되면서 그 경쟁심은 가속도가 붙었습니다. 처음 아무것도 모를 때는 그저 주는 밥 먹고, 가자는 데 따라다니기만 하면 되었기에 다 같은 갓난아이 신세였지만 말문을 조금씩 트고부터는 언어 실력에 따라 선교지 사람들이나 다른 나라 출신 동료들과의 관계에서 조금씩 차이가 났습니다.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다른 동료가 능숙하게 알아들을 때면 왠지 나만 소외되는 것 같아 불안했습니다.

 

  선교지에 발령 받고 나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그 무언가를 무조건 잘하고 싶었고, 누구로부터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누군가로부터 인정받고 싶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대한 순수한 열정과 헌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그것은, 비록 전부는 아닐지라도 어느 정도는, 다른 동료들과의 무의미한 비교 혹은 나 스스로에 대한 가혹한 채찍질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비록 그 덕분에(?) 다른 나라 출신 선교사들이나 신부님들에 비해 비교적 빨리 언어를 습득하고 현지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던 것은 일면 다행한 일일 수도 있으나 그럼에도 저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기도는 점점 빈곤해졌고, 마음은 공허하기만 했습니다. 남들보다 조금 더 앞서가려고 발버둥 칠수록 나는 그렇게 점점 더 바닥으로 가라앉고 있었습니다.

 

선교사 생활에서의 가장 큰 어려움은 많은 이들이 짐작하는 것처럼 열악한 생활환경이 아니라, 사실은 바로 이 밑바닥을 경험하는 것입니다. 삶이 끝없이 떨어지기만 하는 것. 무기력에 휩싸이고, 나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싹터오며 그것이 불안감을 만들어 내고 두려움으로 점점 커져 끝내는 나 자신을 삼켜 버리는 것. 그 바닥은 세상의 바닥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의 바닥인 것입니다.

 

그렇게 나도 몰랐던 나의 밑바닥을 헤매고 있을 즈음, 사람들을 만나서 아직 능숙하지 않은 언어와 외국생활의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예외없이 그들이 나에게 해 주었던 말은 ‘poco a poco(포코 아 포코)’였습니다. ‘천천히, 차근차근’이란 뜻입니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나에게 속도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적응이 빠른 선교사와 그렇지 않은 선교사를 비교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갓난아이의 첫 뒤집기를 기다리고, 첫 걸음마를 기다리는 것처럼 옆에서 묵묵히 지켜보며 기다리고 또 기다려 주었습니다.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해져 있던 나에게 그것은 처음에는 그저 형식적으로 내뱉는 위로의 말 정도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가랑비에 옷이 젖듯 1년, 2년, 3년 계속해서 사람들의 ‘poco a poco'를 들으며 내 마음은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돌이켜 보건대 그것은 단순히 속도를 줄이라는 뜻이 아니었습니다. ‘나의 속도’를 찾으라는 뜻이었습니다. 때로는 숨 가쁘게 달려갈 때도, 또 때로는 느릿느릿 거북이걸음을 걸을 때도 있겠지만, 그 와중에도 끊임없이 나 자신과 주위를 돌아보며 지금 이 순간 동행하고 계신 예수님과 보폭을 맞추라는 뜻이었습니다. 혼자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리느라 예수님을 뒤처지게 놓아두어서도 안 되고, 또 멍하니 다른 것에 정신 팔려 예수님을 저만치 혼자 가게 내버려 두어서도 안 된다는 뜻.

 

나에게 주어진 삶의 속도, 그 가장 나답고 동시에 가장 하느님다운 그 삶을 나는 오늘 하루도 살고자 합니다.

 

 

 

 

 LM_stephano.jpg

박정호_골롬반회 평신도 선교사로 칠레의 빈민가에서 넘치는 사랑을 받으며 살았고, 지금은 한국으로 돌아와 새로운 소명을 식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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