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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2-09-24 16:11:02 댓글: '0' ,  조회 수: '5046'
*** 아래 글은 <2012 .9.13.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에 실린글로 9월 12일 소공동체 전주 지역 모임의 사례 발표문입니다. ***

 

 

 

하나의 평신도로 살아가며

 

 

정복동 (아녜스, 청주교구 감곡본당 신자, 전 골롬반회 평신도 선교사)

 

 

1. 산동네에서 맛본 소공동체

 

 

1993년 서울 신림동 산동네에서 도시 빈민 사목을 시작하였습니다. 어려운 환경의 지역 아이들을 위한 무료 공부방을 운영하면서 지역 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일들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본당신부님은 소공동체 사목을 하는 분으로 우리 지역의 가난한 이들에게 관심이 많은 분이셨습니다. 우리 지역의 가난하고 배우지 못한 분들도 본당에서 사목위원이 되기도 하였고, 가난한 지역의 교우들이라고 해서 본당에서 차별받거나 소외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지역의 젊은 교우 부부들이 신부님과 가톨릭 노동 장년회 활동을 시작하면서 지역 사회 문제를 풀어 가는 데 중추적인 역할들을 하기도 하였습니다.

 

재개발 문제가 본격화되면서 우리 동네는 이권에 따라 편이 갈리고 우왕좌왕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저는 지역의 종교 지도자들(신부님, 목사님, 교무님 등)과 함께 모임을 하며 주민들이 스스로 자신들이 당면한 문제를 풀어 갈 수 있도록 간사로서 역할을 하였습니다. 주민들 조직이 와해될 위기에 처할 때면 지역 종교 지도자들께 도움을 요청하여 함께 주민들을 설득하며 격려하였고, 주민들이 도움을 요청할 때면 종교지도자들에게 협조를 부탁하였습니다.

 

그 당시 우리 지역의 종교 지도자들은 모두 가난한 지역 주민들에게 관심이 많은 분들이었기에 저는 그분들을 대신하여 현장에서 주민들과 호흡하며 신명나게 일할 수 있었습니다. 그 당시 빈민 사목을 하면서 저는 평신도로서 살아가는 것이 제 소명임을 깨달았습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 깊숙이에서 그들과 함께 호흡하며 그분들 안에서 생생이 살아 숨쉬는 하느님을 만나고 사는 삶이야말로 제가 진정으로 살고 싶은 삶임을 깨달았습니다.

 

당시 본당 신부님은 반장, 구역장들 교육뿐 아니라 전신자들을 대상으로 소공동체 교육과 피정을 지도하셨습니다. 또한 예비자 교리도 소공동체용 교재로 하셨는데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새벽 교리반에 저도 함께한 적이 있습니다. 본당신부님은 또한 우리 공부방에서 매주 지역 주민들과 아이들을 위한 미사를 봉헌해 주셨고, 강론 대신 복음 나눔과 생활 나눔을 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 지역 신자들은 서로를 잘 알고 끈끈한 정으로 뭉쳐 있었으며 이웃들의 문제에 관심을 많이 가졌고 공부방 일을 내 일처럼 여겼습니다. 모두들 가난했지만 행복해 했고 남부럽지 않은 자부심과 자신감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신자가 아닌 지역 주민들도 본당신부님을 사랑하고 존경하였으며 천주교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실제로 스스로 성당을 찾는 분들이 많아졌습니다.

 

3-4년의 많은 우여곡절 끝에 지역 주민들이 동네 앞에 새로 지어진 임대 아파트에 입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당시로는 재개발 역사상 처음으로 철거 전 지역 주민들이 집단으로 임대아파트에 이주하게 된 첫 번째 사례였습니다. 대부분의 지역 주민들이 입주를 마쳤고, 동네는 철거가 시작되면서 폐허로 변하기 시작하였지만 정부에서는 제가 살던 공부방은 함께 입주를 할 수 없다는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제가 독신 세대이고 원래 그 지역 주민이 아니며, 요즘처럼 지역 아동 센터로 등록도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주민들과 아이들, 자원교사들은 모두 안타까워했습니다. 저는 폐허더미가 된 동네에 남아 살면서 주민들에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저 스스로 노력하여 함께 임대 아파트로 내려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하였습니다. 지역 주민들이 자신들과 자신들의 자녀에게 그러한 공간이 필요하다고 느낀다면 힘을 합쳐 스스로 노력하기를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저도 끝까지 남아 함께하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본당에서 구역별 소공동체 교육과 피정의 하나로 우리 구역 신자들이 함께 모여 교육을 받게 되었고 저도 참석하였습니다. 복음나누기 7단계를 하면서 6단계에서 함께 소공동체가 할 일, 과제를 논의하다 어느 분인가 지역의 당면 과제 중 하나가 공부방을 주민들이 집단 이주한 임대 아파트에 내려 오도록 하는 것이니 자신들이 그 일을 시작해 보자고 하였습니다.

 

그 뒤로 구역 신자들은 지역 주민들과 함께 동네 주민들의 서명을 받고 시장,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작성하여 보냈습니다. 그러는 사이 폐허에서 저 혼자 위험하게 지내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며 구역에서 조를 짜서 매일 밤 제가 사는 공부방에 함께 와서 시간을 보냈습니다. 신자, 비신자 모두가 혼연 일체가 되어 정부에 요구한 지 1년 여만에 지역 주민들이 사는 임대 아파트에 공부방이 이사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습니다. 이사 후 저는 후배에게 공부방을 물려 주고 그 지역을 떠났지만, 현재까지 그 공부방은 지역 주민과 아이들에게 사랑받는 공부방으로 지역 사회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2. 선교사로서

 

 

신림동 지역에서 제 역할을 마쳤다고 생각한 저는 골롬반 평신도 선교사가 되어 1997년부터 2010년까지 일하였습니다. 처음 생각은 단순했습니다. 신림동 산동네에서 제 역할이 끝나 간다는 생각이 들면서 한국보다 더 가난한 나라의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다는 작은 열망이었습니다.

 

골롬반에 입회하여 교육과 훈련을 받고 대만으로 첫 파견을 받고 떠날 때 저는 신림동에서 함께했던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그 동안 여러분들이 나누어 주었던 사랑을 가지고 또 그것을 믿고, 여러분들을 대신하여 다른 민족 사람들에게로 떠납니다.” 저는 저 혼자 가는 것이 아니라 그 동안 주민들과 함께 나누며 주고받았던 사랑의 힘으로 또 그 안에서 발견했던 하느님을 믿고 떠났습니다.

 

선교사로서 낯선 땅에서 사는 일은 결코 쉽지는 않았습니다. 한국에서 빈민 사목을 할 때는 주민들 스스로 할 수 있도록 돕기도 하였지만 제가 할 수 있는 것도 많았었습니다. 하지만 선교지에서 처음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언어를 배우고 낯선 문화를 배우며 바보처럼 웃는 일뿐이었습니다. 하루 아침에 중증의 장애자로 전락한 느낌이었고, 어른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갓난아이가 된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이 과정을 통해 하느님 육화의 신비를 깊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 앉아서도 다른 나라 사람들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지만, 사랑의 구체적인 표현은 어떤 형태로든 함께하는 것이라고 믿었던 저는 다른 민족 안에서 예수님의 강생의 신비처럼 새롭게 태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에게 자신을 온전히 의탁하여 이 땅에 오신 것처럼 저도 그곳 사람들에게 저를 맡기며 그들과 하느님의 도움으로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제는 복음을 묵상하는 것에 그칠 것이 아니라 제 온몸으로 복음을 쓰고 나누어야 함을 알았습니다. 가난하고 소박한 사람들 속에서 저 자신도 그런 사람이 되어 갔습니다. 한국에서는 제가 아무리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고 평신도로 겸손되이 일한다고 생각했었지만 저는 여전히 가르치는 사람이었고 가진 자였으며 마음 깊숙한 곳에서는 베풀고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중증의 장애자로, 갓난아이로 타민족 안에 태어난 저는 철저히 하느님과 현지인들을 믿고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제 스스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이 되는 체험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활은 짧지만 훨씬 많은 시간 드러나지 않게 이스라엘 사람들 속에서 소박하게 사신 것처럼 제가 선교사로서 일한 것은 어쩌면 대수롭지 않은 것이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먼 곳에서 자신들과 함께하기 위해 왔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현지인들은 저를 사랑해 주었고 친구로 받아들여 주었습니다. 제 친구가 되었던 대만인 노숙자 한 분은 제게 본인은 불교 신자이고 천주교가 무엇인지 모르지만 저를 보면서 제가 믿는 신이 참된 신이며 참된 종교임을 안다고 하였습니다. 과부가 과부 사정 안다고 스스로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이 된 저는 그러한 분들을 자신과 동일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족, 친구, 교회, 나라로부터 버림받고 소외된 자신들을 친구로 받아들이는 저를 보며 제가 믿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그분들을 보면서 저는 감사하고 행복했습니다.

 

미국에서 활동할 때 저는 대만에서와 마찬가지로 주로 노숙자들과 함께 일했습니다. 노숙자들과 한 집에서 한 방을 나누며 살았습니다. 또한 미국인 동료들과 함께 전쟁 반대 등 세상의 정의, 평화, 환경을 위해 함께 일하였습니다. 이런저런 기회를 통해 저는 미국의 평신도들과 교회가 자신들의 교회 쇄신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문제를 드러내고 함께 토론하며 어떻게 앞으로 해나갈 것인지를 치열하게 고민하고 자신들의 삶을 성찰하였습니다.

 

또한 자신들의 정부가 세계 곳곳에서 저지르고 있는 잘못된 일들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교회 사람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그들 중 많은 분들은 이미 가난한 나라에 선교사로 파견되어 일하던 분들이었습니다. 교회가 아무리 선교사들을 많이 파견하고 하느님의 사랑과 선함을 나눈다 하여도 자신들의 정부와 자신들의 삶의 모습이 그보다 더 많은 해를 끼치고 있는 것을 목격한 그들은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와 힘을 합쳐 시정을 요구하고 스스로 변화하는 삶을 살고 세상에 알리려 애썼습니다.

 

미얀마에서 저는 소수 민족의 하나인 카친족과 변방에서 일하였는데 독재 군부 아래서 고통받는 사람들과 교회를 보았습니다.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회에서 뛰어난 신앙을 가지고 열심히 살아가는 신자들과 교회를 보면서 우리도 그런 시대가 있었음을 기억했습니다. 서로에게 큰 힘과 용기를 주고받으며 잘 버티고 살아가는 그분들이 여간 고맙지 않았습니다.

 

대만, 미국, 미얀마에서 활동한 저는 선교사로서 살 수 있었다는 것이 하느님의 큰 축복임을 압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기보다 제 스스로 먼저 복음화될 수밖에 없었던 해외 선교사의 길은 현지인과 그들 나라들을 위한 일이기도 하지만 저와 한국 교회, 한국 사회를 위한 일이기도 함을 깊게 깨달았습니다. 사랑은 주고받으며 성장하고 그를 통해 자신을 알아가게 된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아시아 교회의 선교 주역으로 자처하기 시작한 한국 교회는 이제 많은 선교사들을 파견하고 있습니다(2011년 6월 현재 792명으로 집계 - 한국해외선교사교육협의회 자료).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가 되었다고 자부심을 갖습니다. 하지만 있는 자가 베푸는 시혜의 차원으로 다가간다면 어쩌면 하느님과 복음을 전하기보다 우리의 자만심을 전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선교를 통해 우리 스스로 복음화되고 그 복음을 함께 나누게 되기를 바랍니다.

 

 

3. 다문화 사회에서

 

 

미얀마에서 활동하다 휴가 차 한국에 나왔던 저는 건강 검진 결과 암 판정을 받고 수술을 하고 치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갑작스런 일이었기에 조금 당황했지만 쉬라는 하느님의 선물로 받아들였습니다. 병원 치료가 끝난 후 저는 골롬반을 떠나 고향 본당이 있는 감곡으로 이사하였고 일년 동안 쉬면서 텃밭을 가꾸며 살았습니다. 제 삶을 되돌아보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그냥 병든 몸 자체로도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임이 느껴졌고 그 동안의 삶이 감사했습니다.

 

일년 정도 쉬다 우연히 저희 지역의 다문화 가족 지원 센터에서 일하게 되었습니다. 고향 땅에서 그 동안의 경험과 배움을 종합해서 일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부여받은 것이라 생각합니다. 단일 민족에서 어느 사이 다문화 사회로 변해 버린 한국 사회에서 이주민 여성, 외국인 노동자, 탈북 주민들은 어쩔 수 없이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저는 음성군 다문화 센터에서 상담사로 일하고 있는데 다문화 가족들을 깊이 만나면서 우리 사회와 우리 교회를 다시 한 번 돌아보게 됩니다. 이들은 제가 선교사로서 해외에 살 때와 비슷한 여정을 걷고 있습니다. 하루 아침에 중증의 장애인이 되고 갓난아이가 되어 낯선 문화 속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분들 모두가 저처럼 주님의 강생의 신비를 깨닫고 체험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여러 형태로 자신들의 삶을 받아들이며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애쓰고 있습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내 아내, 내 며느리, 내 가족, 내 이웃이면서도 이들이 외국에서 왔다는 이유로, 우리보다 가난한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로, 말을 잘 못한다는 이유로 무시하고 차별하며 인간 존중을 해주지 않는 분들도 많습니다. 제가 미국에서 만났던 많은 활동가들이 나가서 활동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자기 나라 사람들 스스로를 변화시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헌신하고 있는 심정이 어떤 것인지 이해할 것 같았습니다.

 

저를 선교지의 현지인들이 따뜻한 친구로, 가족으로 받아들여 줬기 때문에 제가 행복한 선교사로 살 수 있었습니다. 또한 우리의 선교사들도 현재 그렇게 살고 있을 것입니다. 이주민 여성들을 포함한 많은 다문화 가족들은 우리 사회에 파견된 또 다른 선교사들이며 함께 사랑을 나누고 배워야 할 하느님의 사랑받는 아들딸들입니다.

 

우리 교회는 또한 이분들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배려하는지 성찰해 봤으면 좋겠습니다. 이방인들에게 잘 대해 주라는 성서의 말씀이 아니더라도 이미 우리 가족, 우리 이웃이 된 이분들에게 우리 교회가 그리고 소공동체 모임이 진정 이분들을 식구로 맞아들이고 있는지 또 어떻게 함께하는지 살펴 봤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것으로 동화되기만을 강요하지 말고 이들을 통해 우리도 배우며 함께 성장하는 사회와 교회가 되기를 꿈꾸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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