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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3-01-29 15:59:51 댓글: '0' ,  조회 수: '6557'
***** 아래 글은 「생활성서」 2013년 2월호에 연재된 글입니다. *****

 

 

 

굿바이, 마리아 할머니

 

 

박정호 _ 성골롬반외방선교회 평신도 선교사

 

 

마리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혈액암으로 오랜 기간 동안 고생하시다 입원해 계시던 중환자실에서 이제 더 이상의 치료는 의미가 없다는 통보를 받고 집으로 돌아와 쉬시던 중 그렇게 가시게 되었다. 가끔 찾아가서 뵐 때마다 당신 입으로 이제는 희망도 없고 하느님 만날 날만 기다리고 있다며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정정하시고 웃음을 잃지 않은 분이셨기에,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사람들이 가득 몰려 있는 그 집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할 뿐 섣불리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날도 베로니카와 나 두 사람 모두에게 일이 있어 언제나 그랬듯 마리나 아주머니에게 시우를 맡기러 가던 차였다. 그런데 그날따라 유난히 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는 마리아 할머니네 집을 보게 된 것이다. 아주머니에게 저 집 오늘 무슨 날이냐고 물으니 아침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멍한 정신을 가다듬고 사람들 사이를 지나 집으로 들어서니, 그동안 거동이 불편하신 할머니가 누워 계시던 침대가 사라지고 휑하니 넓은 거실 한가운데 갖가지 꽃으로 하려하게 장식된 관 하나가 놓여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시선을 천천히 움직였다. 색색의 꽃들과 관의 문양과 촛대와 십자가, 침침한 조명과 주위에 둘러앉은 사람들, 관 옆에 놓인 여러 사진들…. 마치 어릴 적 무언가 먹을 때 가장 맛있는 부분을 마지막까지 남겨 놓듯, 유리로 되어 있는 관 위쪽으로 선뜻 시선이 옮겨지지 않았다. 어떤 큰 상실감이 몰려올 것 같은 두려움 때문이었으리라. 하지만 의외로 할머니 표정은 편안하셨다. 나도 눈물은 흘렸지만, 할머니 표정을 보니 오리혀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간 가끔 만나 안부를 물을 때마다 많이 아프다고, 힘들다고 말씀하시던 게 생각이 났다. 이별의 아픔보단 ‘이젠 편안하시겠지.’하는 안도감이 더욱 컸다.

 

할머니 내외를 처음 만난 건 칠레에서 처음 와서 정착한 동네에서였다. 평소에는 그저 옆집에 사는 노부부 정도로만 알고 있었고 특별한 왕래가 없었는데, 어느 날 새벽 할아버지가 갑작스런 호흡곤란으로 힘들어 하실 때 차로 응급실까지 모셔다 드린 게 계기가 되어 자주 방문하게 되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각각 원래의 가족이 있었지만, 20여 년 전 두 분이 재혼을 하시면서 이곳으로 와 사시게 되었다. 자녀들과 별로 왕래가 없었던 탓에 늘 시내에 사는 손주들을 보고 싶어 하셨고, 그래서인지 우리 아이들을 너무도 예뻐해 주셨다. 할머니는 골롬반 선교회 달력에 나온 우리 부부 사진을 오려서 침대 머리맡에 붙여두고 우리가 방문할 때마다 그 사진을 보여 주시며 ‘늘 너희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노라.’고 말씀하셨다.
조문을 마치고 집을 나서며 자녀들과 간단한 인사를 나누었다. 당연히 좀 더 많은 위로의 말을 전했어야 했지만 그다지 긴 얘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집을 나섰다.
사실은 돌아가시기 몇 주 전 우연히 지나가다 한 번 들른 적이 있었다. 그때는 이미 병세가 많이 악화돼 거동을 하실 수 없었고 할머니의 자녀들이 곁에서 돌아가며 병간호를 하고 있었다. 평소처럼 대문에서 할아버지를 만나 안부를 묻고는 할머니를 20130129_4.jpg 뵈러 들어갈 수 있냐고 묻자 할아버지께서 잠깐 기다리라 하시고는 안으로 들어가셨다. 한참 후에 쭈뼛쭈뼛한 표정으로 나오신 할아버지는 지금 기저귀를 갈고 계셔서 만나기가 좀 그렇다고 하시면서 굉장히 미안해하셨다. 나는 다음에 오면 되니 걱정 말라고 하였고, 할아버지는 몇 번이나 미안하다 하시고는 다음에 꼭 오라고 당부하셨다.
그리고 며칠 뒤, 이번에는 베로니카와 함께 다시 방문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방문을 하기 전 동네 이웃아주머니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할머니를 간호하는 자녀들이 동네이웃이든 누구든 방문을 원치 않는다는 것이었다.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으나 환자들을 방문하고 함께 기도해 주는 것을 큰 축복으로 여기는 칠레 사람들 정서상 좀 이상하다 생각하며 대문에서 할아버지를 불렀다. 그러자 이번에는 할아버지 대신 딸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나오시더니 지금 주무시고 계셔서 만날 수 없다는 단호한 대답만 하고는 문을 닫아 버렸다. 그것이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었는데 그렇게 인사도 못 드리고 떠나보낸 게 속상하고 뒤늦게 그 자녀들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할머니 쪽의 자녀들이, 두 분이 20년 이상 사신 그 집을 상속받아 팔아버리려 하였다는 것이다. 다행히 낌새 를 눈치 챈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이웃들의 도움을 받아 미리 그 집의 소유권을 할아버지 쪽으로 옮겨놓아 그나마 홀로 남으신 할아버지는 여생을 보내실 공간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다음 날 저녁, 신부님을 모시고 연도를 갔다. 할머니 살아 계실 때 함께 찍은 사진에다 잘 가시고 편히 쉬라는 인사를 적어 할머니 머리맡에 놓아 드리고, 하느님 만나 신나고 즐겁게 지내시길 기도드렸다.

 

날씨가 많이 더워졌다. 이제는 뜨거운 것도 모자라 햇볕이 따갑기까지 하다. 강렬한 칠레의 여름태양처럼 뜨겁게 내리쬐던 병마의 고통을 내려놓고 이제는 기나긴 시에스타(이른 오후에 자는 낮잠-편집자 주)에 들어간 마리아 할머니. 부디 행복한 꿈꾸시기를 소망해 본다.

 

 

 

* 박정호 선교사는 성골롬반외방선교회 평신도 선교사로 2008년부터 칠레에서 아내 김규희 선교사와 함께 청소년·가정 사목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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