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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3-05-30 10:45:22 댓글: '0' ,  조회 수: '6432'
***** 아래 글은 「생활성서」 2013년 6월호에 연재된 글입니다. *****

 

 

 

사랑하지 않는다면 반칙

 

 

 

박정호 _ 성골롬반외방선교회 평신도 선교사

 

 

가끔 아니 이제는 자주, 한국이라는 나라가 낯설다. 내가 칠레 사람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면 갈수록 한국이 내게서 점점 멀어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특히 이따금씩 인터넷으로 한국의 뉴스들을 보고 난 후에는 더욱 그렇다. 지금 며칠 전의 뉴스기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한 초등학생을 명문중학교에 진학시키려는 학부모가 더 좋은 평가 성적을 위해 그 아이 반 전체를 대상으로 재시험을 요구했다는 이야기였다. 아니, 잠깐만. 이건 반칙이잖아. 나는 어린나이에 중학교 입시에 내몰리는 그 초등학생에 대한 연민이나 교육자로서의 양심을 버리고 부정한 일에 동참한 그 교사에 대한 안타까움보다는, 사실 그 반칙의 상황에 더 분노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여하튼 나는 그렇다. 나는 반칙을 아주 싫어한다.

 

지난주, 세 살 된 큰아들을 데리고 동네 마트에 갔다. 원래 자주 가던 마트가 있었는데 그날은 웬일인지 문득 반대방향의 다른 곳을 가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 그쪽으로 향했더랬다. 작은아들 기저귀와 이것저것 먹을거리를 사기 위해 입구로 들어갔는데, 내가 들어가자마자 청년(이라기보다는 학생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만한 앳돼 보이는) 두 명이 곧이어 따라 들어와서는 순식간에 입구를 지키고 있던 경비원 두 명의 뒷목에 총을 겨누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총을 겨누는 사람이나 붙잡힌 경비원이나 주위에 있던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편안하고 익숙한 표정들이라 나는 그들이 장난을 치고 있는 줄 알았던 것이다. 어떤 이는 얼굴에 가벼운 웃음마저 띄었다. 그 왜 TV 뉴스 같은 것을 보면 대개 강도를 만났을 때는 사람들이 당황하거나 막 소리 지르거나 혼비백산해서 도망치거나 하지 않는가. 간혹 용감하게 맞서 싸우는 사람도 있지만. 아무튼, 그날 내가 처했던 상황이 평소에 상상하던 상황과는 적지 않은 괴리가 있었던 것이다.

 

하여, 동네 친구들끼리 장난을 치고 있구나 생각한 나는 씨익 웃으며 저쪽 모퉁이에 있는 쇼핑카트를 꺼내기 위해 유유히 그들 앞을 지나갔고, 카트를 하나 꺼내서 시우를 태운 다음 물건을 사러 들어가기 위해 입구 쪽으로 방향을 틀었을 때, 순간 나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경비원, 직원들, 아르바이트 학생들, 물건 사던 손님들이 죄다 바닥에 엎드려 있는 것이 아닌가. 그 넓디넓은 마트에서 단 세 사람, 총을 든 그들 둘과 쇼핑카트를 잡은 나만 멍하니 서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르긴 해도 아마 그들도 적잖이 당황했을 터이다. ‘저 외국인에게 뭐라고 하면 알아들을까?’ 뭐 이런 종류의 고민을 아주 잠깐 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그들이 고민할 필요도 없이 나는 알아서(?) 조용히 시우를 안고 엎드렸고, 시우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그 상황에서 아빠를 끌어안고 장난을 치는 통에 1분이 마치 10년처럼 느껴지기도 했지만, 다행히도 그들은 이쪽은 신경도 쓰지 않고 능숙하게 직원들을 협박하여 계산대의 돈을 꺼내 유유히 사라졌다.

 

놀라운 것은 그들이 사라지고 난 후, 쥐죽은 듯하던 마트 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 빠르게 활기를 되찾아 가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권총으로 협박당했던 여직원 1명만이 놀란 마음에 훌쩍거리고 있었을 뿐, 다른 직원들은 그들의 일을 계속하였고, 물건 사던 손님들도 쇼핑을 계속 하였고, 한쪽에서 쉬고 있던 아르바이트 학생들도 키득거리며 그들의 수다를 계속 이어갔다.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심각한 표정을 짓거나 황당해하거나 혹은 이 엄청난 경험을 알리기 위해 전화기를 붙잡는 사람이 없었다. 오직 나만이 조금 전 그 강도들을 마주했던 표정으로 한동안 멍 하니 카트를 붙잡고 서 있었다. ‘잠깐, 이건 반칙인데….’하며.

 

푸엔테알토Puente alto. 우리 동네 이름이다. 다른 동네에 가서 이곳에 산다고 이야기 하면 ‘아~ 푸엔테 아살토asalto'하며 낄낄거린다. 아살토는 ’강도‘란 뜻이다. 워낙 범죄와 사고가 많다 보니 강도들이 많이 사는 지역으로 칠레에서는 제법 유명세를 타는 곳이다. 그래서 그런지, 사람들이 강도를 만나는 것이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닌 것 같다. 반칙이 일어나는 곳, 워낙 많이 일어나다 보니 사람들이 무감각해지고 , 그래서 어느 정도의 반칙은 세상을 살아가는 규칙이 되어버린 곳. 오늘날 내가 선교사로 살아가고 있는 곳이다.

 

사실, 정도만 다를 뿐 우리는 모두 비슷한 상황에 살고 있지 않나 생각된다. 칠레의 다른 곳이라 해서 반칙이 없는 것이 아닐 테고 한국이라 해서 또 다르지 않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풍족하고 발전된 사회일수록 오히려 더 정교하고 예리하게 다듬어진 반칙이 난무하는 것을 우리는 이미 경험하고 있다. 반칙은 더 이상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 능력이 되었다.

 

 

 20130530_01.jpg
▲ 성소 주일 행사때 사람들에게 골롬반 선교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 필자 부부.
  그분을 향해 걸어가는 반칙없는 여정에 많은 분들이 동참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선교사 임기의 절반을 지나고 있는 요즘은 중간평가 기간이다. 선교사로서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현재 어떻게 살고 있는지, 또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를 평가하는 것이다. 이 평가는 잘했다고 보상을 받는 것도 아니고 못했다고 질책을 받는 것도 아니다.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뤄내야 하는 실적이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태초에 그분이 정하신 이 세상과 모든 피조물에 대한 규칙을 충실히 따르며 살고 있는가 하는 것을 스스로 평가하는 것이다. 그 규칙은 바로 ‘사랑하기’이며,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건 반칙이다.

 

 

 

 

 

* 박정호 선교사는 성골롬반외방선교회 평신도 선교사로 2008년부터 칠레에서 아내 김규희 선교사와 함께 청소년·가정 사목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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