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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등록일: 2012-05-29 11:37:23 댓글: '0' ,  조회 수: '9306'

* 아래의 글은 「생활성서」5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다시 한 발 내딛다

 

 

박정호 _ 성골롬반외방선교회 평신도 선교사

 

 

   이별이란 게 그토록 힘든 줄 예전엔 몰랐었다. (써 놓고 보니 무슨 노래 가사 같다.) 늘 새로운 곳을 동경하고 있었고 어디론가 떠나고 싶었다. 모든 익숙한 것들로부터 떠난다는 것은 언제나 나에게 새로운 활력과 희망과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벅찬 그 무언가를 안겨 주곤 하였다. 이별은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었다. 하지만 잠시 동안의 본국 휴가를 마치고, 가족과의 두 번째 긴 이별을 앞두고는 얼마나 심란하던지.... 떠나도 언젠가는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기대가 그동안 나의 마음을 떠받치고 있었다면, 이제는 그런 기대가 점점 희미해져 감을 느끼면서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자의로든 타의로든 다시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고, 설령 돌아와도 돌아온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출국 며칠 전부터 가슴 한구석이 아련히 저려오며 온몸을 괴롭히더니 이틀전에는 주체할 수 없는 감정이 가족들 앞에서 폭발해 버리고 말았다. 그날 저녁, 고향친구와 소주잔을 기울이며 내뱉었던 말은 비록 진리는 아닐지라도 진리에 상당히 근접한 꽤 괜찮은 말이라 생각된다.

이별의 순간은 짧을수록 좋단다, 친구야.”

 

   그렇게 저렇게 겨우 감정을 추스르며 가족들과의 이별을 마무리하고 출국준비를 위해 서울로 왔는데 웬걸, 출국 하루 전날 둘째 녀석이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야 말았다. 그간 베로니카의 몸 상태가 평소 같지 않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하필 이때 임신이라니····. 밤새도록 회의가 이어졌다. 칠레로 갈 것인가 말 것인가. 출국이 하루앞으로 다가왔고 두 번째 임기를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지만, 이미 한 번 뼈저리게(그때 생각을 하면 정말 뼈가 저리다) 경험한 외국에서의 출산의 고통은 이 모든 준비들을 백지화시키기에 충분했다. 또한 한국에서의 휴가기간 동안 느꼈던 가족과 지인들의 따뜻한 환대며, 편리하고 쾌적한 병원시스템, 필요한 물건들이 빠짐없이 준비되어 있는 마트와 인터넷 등은 우리를 눌러 앉힐 만큼의 달콤한 유혹이기도 하였다.

 

   다음 날 아침, 결국 우리는 떠나기로 결정했다. 맨 처음의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어떻게든 될것이기 때문이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고 호수 위로 발걸음을 내딛듯, 그렇게 우리는 또 한 발자국 내디뎌 보기로 하였다. 그러나, 인천을 출발하여 경유차 들른 밴쿠버에서 또다시 일이 터지고 말았다. 가방 하나가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컨베이어 벨트가 멈춰 설 때까지 짐을 기다리다가 결국 토론토행 비행기를 놓치고 말았다. 사무실에 가서 분실신고를 하고 헐레벌떡 뛰어가 다음 비행기를 타고 토론토에 도착한 것은 밤 1030. 토론토에서 산티아고로 향하는 국제선 비행기 출발시간은 1045.

 

   디오스 미오 Dios mio!(맙소사!)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은 15분이었다. 배낭 메고 한 팔에 시우 안고 같은 손에 뽀로로 인형 들고 다른 손에 기저귀 가방 들고 미친 듯이 뛰었다. 공항은 도대체 왜 그리 넓은지 뛰어도 뛰어도 국제선터미널은 보이지도 않는다. 숨이 턱에 차고, 뒤처진 베노리카가 먼저 가라며 손짓을 할 때는 포연탄우(砲煙彈雨) 생사 간에 전우의 생명을 걱정하는 비장함 마저 느껴진다. 여유 있게 면세점 구경도 하고 캐나다 공항에서 커피도 한잔 하면서 칠레에서의 미래를 그려 볼까 하던 꿈은 깨진 지 오래다. 숨도 차고, 과연 비행기를 탈 수 있을까 속도 타고, 이러다 배 속에 있는 둘째가 어찌 되는 것은 아닌지 걱정도 되고 미치고 폴짝 뛰고 간절한 기도가 절로 나오는데, 오른팔에 안긴 아들 녀석은 뭐가 그리 좋은지 공항이 떠나가라 깔깔거린다. 뛰니까 좋은가 보다.

 

   출입문을 닫고 출발 준비를 하던 비행기를 겨우 잡아 세워서 들어가니 다시 땀이 비 오듯 흐르고, 아기 때문에 8개월 전에 미리 예약해 두었던 우리 자리는 이미 다른 사람들이 두 다리 쭉 뻗고 차지하고 있었다. 우리는 한 사람씩 떨어져서, 그것도 오도가도 힘든 가운데자리다. 그나마 베로니카와 내가 앞 뒤로 앉아서 밥 먹을 때나 화장실 갈 때 아기를 농구공 패스하듯 앞뒤로 넘겨가며 칠레로의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비행시간만 총 28시간. 우여곡절 끝에 산티아고에 도착하였지만 그리움이나 이별의 아픔 따위는 잊은 지 오래고 사라진 여행가방과 기별도 없이 홀로 아르헨티나까지 가 버린 유모차를 아쉬워하며 남미에 도착했다는 진한 현실감을 온몸으로 느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무사히 도착했다는 안도감에 오히려 감사할 따름이었다. 여유 있는 여행을 생각하며 오래전에 미리 세워 두었던 계획들, 지인들을 위한 선물이 담긴 여행가방, 한국에서 가져온 유모차, 그리고 갑자기 생긴 둘째까지 세상일이 내 뜻대로 되지 않을 수도 있음을 다시 한 번 뼈저리게 실감하고 또한 그렇다고 화를 내거나 힘들어 할 필요도 없음을 배운다. 살아 있음 그 자체로 감사하지 않은가 말이다. 가족들도 무탈하고.

 

   어렵게 결정한 두 번째 임기를 혹독하게 시작한 우리 가족. 어쩌면 하느님께서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우리의 의지와 각오를 테스트 하신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나의 부족함과 한계를 인정하고 결국은 성령의 이끄심에 내맡기게 되는 것, 선교사보다 먼저 선교지에 도착하신 그분의 이끄심을 따라가는 것. 그것이 그분이 원하시는 것이라 느껴진다.

주님,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이 땅과 이 사람들과 저희 가족을 축복해 주시고 지켜 주소서.

 

 

 

박정호 : 성골롬반외방선교회 평신도 선교사로 2008년부터 칠레에서 아내 김규희 선교사와 함께 청소년·가정 사목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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