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뉴스 지금 여기] 낯선 땅에서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는 골롬반 선교회

2013-11-06T14:38:58+09:00

작성자: 관리자등록일: 2013-11-06 14:38:27  조회 수: ‘6504’

*** 아래 기사는 2013년 10월 29일 「가톨릭뉴스 지금여기」에 게재된 기사입니다. *** 

 

낯선 땅에서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는 골롬반 선교회

[인터뷰] 오기백 신부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한국지부장)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한국 진출 80주년을 맞아 서울 동소문동에 있는 한국지부를 방문해 지부장 오기백 다니엘 신부를 만났다. 오기백 신부는 아일랜드 서남쪽 코르크 지역의 바닷가 마을 반트리 출신이다. 그는 당시 남미 지역에 선교사를 파견하던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에 입회해 남미 선교를 떠나고 싶었지만, 총장 신부의 권유로 1976년에 한국 땅을 처음 밟았다.

광주대교구 흑산성당 보좌신부를 시작으로 목포 연동성당 보좌로 일했는데, 그가 만난 한국 사람들은 군사정권의 서슬 퍼런 폭압 속에서 고통 받고 있었다. 1980년 광주민중항쟁을 겪으면서 오기백 신부가 노동사목을 시작한 것은 공단지역이었던 부천 삼정동이었다. 노동자들의 쉼터이며 교육장, 노동 상담소였던 ‘부천 새날의 집’에서 그는 9년 동안 노동자들과 부대끼며 살았다. 한국말도 어느새 익숙해졌고, 힘겨운 날도 있었지만 재미있는 경험도 많이 했다.

아직은 외국인들이 낯설던 그 지역에서, 어느 날 새날의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길에서 한 청년이 물었다. “기브 미 시가렛!” 오기백 신부는 잠깐 멈칫거리다 답변했다. “나, 담배 없어요.” 놀란 것은 그 청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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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한국지부장 오기백 신부 ⓒ한상봉 기자

 

 

그 후 오 신부는 아일랜드의 대학원에서 3년간 신학을 공부하고 돌아왔고, 1992년부터 6년 동안 서울 봉천동 산동네에서 셋방을 얻어 가난한 주민들과 살았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한국지부장을 한 차례 맡았다가, 해외선교사 교육을 시작한 것은 2005년이었다. 한국에서 다른 나라로 선교를 떠나는 사제와 수녀, 평신도들을 양성하는 일이다.

최근에 다시 한국지부장을 맡아 한국 진출 80주년 행사를 준비해 온 오기백 신부의 삶은 곧바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의 이력을 보여주고 있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는 지난 80년 동안 끊임없이 ‘세상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낯선 땅에서 선교사로 살아왔다.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불청객으로 살면서, 때로는 그들의 친구로, 때로는 사제로 그 시대의 가장 어려운 이들과 연대했다. 노동운동과 빈민운동에 동참해 온 그들이 최근에는 평화운동과 환경운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오지에서 선교하는 공동체

일제 강점기였던 80년 전,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가 한국에서 처음 선교를 시작한 곳은 전라도 지역이었다. 대구대교구의 플로리안 드망즈(한국명 안세화) 주교가 남쪽 오지였던 전라도에서 선교해 줄 것을 그들에게 요청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훗날 마찬가지로 오지이며 ‘가난한 땅’이었던 강원도에서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이들이 이처럼 험한 곳을 자청하고, 잘 살아낼 수 있었던 힘은 무엇보다 선교사들 사이의 ‘목숨을 내줄만한 우정’이라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한국전쟁 시절에도 노 사제들이 젊은 사제들을 모두 부산으로 피난 보내고, 당신들은 전라도 지역 교회에 남아서 본당을 지키다가 결국 일곱 분의 사제가 죽고, 두 분의 사제가 이북으로 끌려갔다”고 오기백 신부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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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당시 순교한 선교사 추모비 앞에서 ⓒ한상봉 기자

 

 

 

전쟁 이후 온통 폐허가 된 한국 사회를 지원하기 위해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는 10년에 걸쳐 100여 명의 선교사들을 파견해 강원도와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했다. 196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근대화 열풍에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드는 인구가 늘어나면서, 도시 변두리에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하자,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는 그곳에 작은 공동체를 세워서 활동을 시작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선교회의 선택은 혁명과 내란을 겪던 중국에서 선교하던 에드워드 갤빈(Edward Galvin) 주교의 정신에 따른 길이었다. 갤빈 주교는 당시 교회 재산을 팔아서 난민을 위해 쓰자고 제안했다. 20세기 초반의 선교 개념은 세례를 많이 주어 신자를 늘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갤빈 주교는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매일 만나고 있었기 때문에, 학교나 병원을 짓기 위해 모금한 돈마저 당장 눈앞에서 만나는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줄 수밖에 없었다. 그때 갤빈 주교는 “나중에 학교나 병원이 필요하다면 하느님께서 그때도 필요한 것을 우리에게 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이러한 태도가 1960~70년대를 거치면서 선교 개념을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로 발전시켰다.

가난한 이들과 연대하는 선교회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가 한국 사회의 현실을 격렬하게 경험한 것은 광주항쟁이었다. 1980년 광주항쟁 당시에도 그곳에 골롬반 신부들이 있었다. 외무부는 영국 대사를 통해 광주에 남아 있는 신부들을 모두 철수시키라고 요청했다. 그날 오후 선교회는 광주에서 긴급회의를 열고, 아픈 신부들은 ‘명상의 집’으로 피신하고, 나머지 선교사들은 광주에 남기로 했다. 한국전쟁 당시에 본당에 남기로 결정했던 선배들과 같은 정신으로 일하자는 것이다.

광주 사정을 김수환 추기경에게 알리려고 김성룡 신부가 광주를 빠져나올 때 은 다니엘 신부는 위험을 무릅쓰고 김 신부를 자기 차에 태워 동행했다. 광주에서는 골롬반 선교사들이 본당에서 희생자들 가족을 위로하고 상무대 영안실에 함께 찾아가기도 했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는 1976년 세계총회에서는 ‘사회정의’를 강조했고, 1982년 세계총회에서는 이 원칙을 더 세밀하게 신학화하며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 그리고 정의구현 활동을 강조했다. 이런 선교 개념 설정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한국에서도 선교사들이 젊은 사제들 중심으로 인권운동과 노동운동, 농민운동 그룹과 함께 일하기 시작했다.

1982년 총회는 “죄로 분열된 세계―억압적인 정권과 이데올로기, 불의한 사회구조와 체제, 폭력과 핵전쟁의 위협들이 존재하는 곳―에서, 모든 민족과 백성은 절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지를 듣고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다. 더 나아가 “가난한 이들에게 누적되는 불행은 불의의 소산”이라는 판단 아래, 가난한 이들의 죽음을 조장하는 구조에 저항하고, 이로 인한 순교를 감수하는 교회를 재발견해야 한다고 말했다.

“설령 교회가 공격당하고 있지 않다 하더라도, 인간 생명에 대해 자행되고 있는 계속적인 박해는 하느님 나라에 대한 공격이 되며, 이 하느님 나라에 봉사하기 위해서 존재하는 교회에 가장 심각한 폭행을 가하는 결과가 된다. 가난한 이들이 삶을 위한 투쟁에서 억압받을 때, 이것이 곧 하느님 나라 그 자체를 멸절시키려는 행위가 된다. 가난한 이들에게 죽음을 가져오는 체제를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어느 것이 되었든지 우상숭배인 것이다.” (<현대사회 속의 골롬반 선교―제8차 골롬반 총회의 결의문>, 1982년, 페루 리마)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의 기노엘 신부와 이 크리스 신부는 1981년에 신림10동의 빈민촌에 집을 얻어 살면서 지역 주민들과 신용협동조합운동과 교회 기초공동체를 꾸렸다. 이 집을 ‘사랑의 집’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빈민촌에 살면서 세운 기본원칙이 있다. 우선 사제관이나 성당을 짓지 않고, 지역에 방을 얻어 가난한 이들과 똑같이 사는 것이다. 이렇게 그 지역에서 교회의 현존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들의 문화와 생활에 적응하면서 그들에게 필요한 일을 하는 것이지 개종이 궁극적 목표도 아니었다. 이런 방식의 활동은 나중에 생긴 서울대교구의 ‘선교본당’ 개념에 맞닿아 있다.

전라도 광주에서 호반 신부는 노동사목에 주력하는 ‘성 요셉의 집’을 시작했다. 경기도 안산에서는 원곡성당에서 신오복 신부, 기리암 신부, 장 레이몬드 신부, 모 미카엘 신부 등이 본당사목을 하면서 동시에, 평신도 활동가였던 조여옥, 계인선 등과 노동사목을 시도했다.

나중에 노동자들이 성당 근처에서 데모를 하다가 죽는 바람에 문제가 생겼다. 평소 노동사목을 불편하게 여기던 당시 수원교구장 김남수 주교가 원곡성당의 노동상담소에 대한 폐쇄 명령을 내린 것이다. 당시 본당 주임사제였던 모 미카엘 신부는 “상담소가 폐쇄된다면 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린 교구에서 철수하겠다”고 해서, 결국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가 원곡본당을 떠나게 되었다. 나중에 수원교구 소속의 후임 사제가 원곡성당에 부임해 노동사목을 내보내자 노동자들이 주교관에 가 항의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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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철거민들과 함께하는 오기백 신부 (사진제공/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본당사목보다 더 절실한 선교

1984년부터 88년까지 서 로베르토 신부가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한국지부장을 맡게 되면서, 선교회는 본당사목에 대한 재정 지원을 중단했다. 이미 한국 교회의 교구와 본당은 충분히 성장했다고 판단한 것이다.

선교회는 더 가난한 이들에게 내려가기로 결정했다. 1988년 부산에서 열린 세계총회는 다시 한 번 “복음적 선택으로서의 가난한 이들과의 결속”이 사목의 중심이 되어야 함을 확인하고, 세상의 가난한 이들과 창조적으로 결속하기 위해 생태학적 관심으로 확장되어야 함을 결정했다. 따라서 선교회는 빈민과 노동자, 그리고 정의를 위해 싸우는 사회운동단체와 더 연대하기로 했다.

한편 전 요한 신부와 메리암 신부 등은 왕십리에 세운 가톨릭 학생회관을 중심으로 ‘선택’ 프로그램을 처음 도입하기도 했다. 전 요한 신부는 최근 ‘선택’ 프로그램을 발전시켜 ‘결혼재발견운동’을 시작했다. 가톨릭 학생회관에서는 야학도 시작했다. 본당에서도 야학을 열었는데, 제일 먼저 가톨릭 야학을 시작한 곳은 돈암동성당이다.

양 노엘 신부는 돈암동성당에서 가톨릭노동청년회(JOC)를 조직해 노동자 모임을 열었다. 면목동성당 야학에는 YH 여성노동자들이 많이 다녔는데, 그들이 노조를 만들면서 그 유명한 YH사건이 일어났다. 을지로5가에는 노동자센터를 세웠는데, 이 건물은 1980년에 서울대교구로 넘어간 뒤에, 교구가 이 건물을 팔아 종로성당을 짓고, 그곳에 노동사목회관을 유치했다.

안성도 신부는 단주 모임을, 백 바오로 신부는 단도박 운동을 벌였는데, 이는 한국에서 이런 운동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다.

국제선교단체의 경험으로 선교사를 양성한다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는 1984년부터 자신들의 선교에 대한 경험을 토대로 선교사 양성 프로그램을 실행하고 있다. 주로 평신도선교사를 양성해서 해외로 파견해 왔는데, 최근에는 교구에서 지원한 사제들도 양성해 해외선교지로 파견하고 있다.

선교사 훈련을 하면서, 몇 가지 원칙을 세워 두었는데, 첫 번째는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한다는 것, 두 번째는 시대에 맞게 일하도록 한다는 것, 마지막으로 젊은이들이 아이디어를 내면 뭐든 일단 해보라고 제안한다는 것이다. 선교사들에게 미리 프로그램을 마련해주고 파견하는 게 아니라, 현지에서 실험적으로 자신이 생각한 대로 해보도록 권유한다.

현재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는 한국 진출 80주년을 맞이하면서 새롭게 자신들의 과제가 무엇인지 식별하는 중이다. 먼저 ‘선교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 선교사를 교육하고, 잡지나 홈페이지를 통해 선교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정보를 공유하고 있다. 둘째로 평화운동에 주력하고 있는데, 이미 강정마을 등에서 평화운동에 참여하고 있는 함편익 신부나 종교간 대화를 추진하고 있는 임 예몬 신부의 활동이 주목할 만하고, 선교센터에서도 이 시대에 필요한 프로그램을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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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는 아일랜드 출신으로 유럽에 수도회 전통을 전파한 성 골롬반의 뜻에 따라 ‘나그네처럼’ 해외 선교에 주력하고 있다. ⓒ한상봉 기자

 

 

기리암 신부 등은 미리암 센타와 함께 다문화 가족들을 위한 사목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현재 골롬반 신부는 32명이고, 신학생 3명, 평신도선교사 3명이 있는데,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선교사들 자체가 7개 나라에서 온 다문화 그룹이다. 문화적 차이를 지닌 이들이 함께 살면서 경험하는 것은 선교회의 풍요로운 자산이다. 오기백 신부는 “이 풍요로움을 나누면서, 다문화의 도전을 받고 있는 한국 교회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2012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세계총회에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는 “성령께서는 모든 경계선을 넘어 우리를 친교로 부르고 있다”면서, 선교회가 가난한 이들과의 연대뿐 아니라 정의 · 평화 · 창조질서보존운동(JPIC), 타종교와의 대화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오기백 신부는 “가난의 영성은 한국 교회가 성장함에 따라 큰 제도 안에서는 보기 어렵지만, 여전히 가난의 영성을 사는 소수가 있다”면서, 특별히 프란치스코 교황의 등장으로 “교회가 다시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아일랜드 교회에서도 교회에 대해 반감을 느끼던 이들이 교황의 최근 행보를 보면서 감동해서 ‘아직 교회 안에 복음적 가치관을 지닌 지도자가 있구나’ 생각하고 교회로 돌아오고 있다고 한다. 그는 “특히 새 교황으로 인해 교회 지도자들이 자극을 받고 있는 것은 희망적인 현상이다. 교황이 람페두사에서 난민들의 손을 잡아주었듯이 교회는 가난한 이들에게 다시 관심을 돌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국제적 네트워크, 평화운동에 도움 줄 것

오기백 신부는 한국 진출 80주년을 맞아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가 예언자적 직분을 수행하면서, 국제적 차원의 선교단체라는 것이 주는 이점을 최대한 살리고 싶어 했다. 한국 상황에 대한 국제적 네트워킹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함편익 신부처럼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반대하는 운동을 하다가 비자 발급을 제한당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오히려 국내 상황을 해외 선교단체들과 연결해 공유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에 방문한 선교사들이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를 통해 제주 강정마을에 찾아가기도 하고, 강동균 강정마을회장 등이 아일랜드에서 모임을 열기도 했다.

이처럼 국제선교회는 해외 교회의 소식을 한국에 소개하고, 한국 상황을 해외에 소개하기도 한다. 또한 다른 나라에 선교를 다녀온 회원들이 그 나라에서 새롭게 경험한 것을 나눔으로써 한국 교회에 변화를 줄 수 있다는 게 오기백 신부의 생각이다. 오기백 신부는 “선교사들, 특히 남미나 필리핀, 대만 등에 가서 오랫동안 선교활동을 하다보면, 한국 교회에서 경험하지 못한 복음과 선교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얻게 된다. 이러한 생활적 통찰은 교구사제들이 한국에서 아무리 연구해도 얻을 수 없는 풍요로움이다. 다른 문화 속에서 살아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는 자신의 강점을 이용해 한국 교회의 쇄신과 사목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국제화를 통해서 우리가 얻게 된 우리의 선교적 카리스마의 이런 새로운 일면은 복음선포자들과 복음의 메시지 그 자체가 본질적으로 함께 결합되어 있다는 진리를 강조한다. 선교회로서 우리는 공동체 생활 안에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증거하고 있다. 여기서 또한 문화와 국적의 경계를 넘어서게 되고, 아울러 복음의 징표가 드러난다.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는 더욱 더 의미 있게, 구원의 선물을 모든 이들에게 선포할 수 있다.” (<더욱 선교적이 되는 것―골롬반총회 결의문>, 1988년, 대한민국 부산)

 

 

한상봉 기자 | isu@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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