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비타꼰] 성골롬반외방선교회 민디오니시오 신부(上)

2012-12-21T10:46:57+09:00

작성자: 관리자등록일: 2012-12-21 10:46:53  조회 수: ‘6042’

*** 아래 기사는 2013년 1월호 「가톨릭 비타꼰」 에 게재된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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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선교사에 대한 기억
성골롬반외방선교회 민디오니시오 신부(上)
 

 

1969년 4월 6일 아일랜드에서 사제서품을 받고 그해 10월 한국에 온 성골롬반외방선교회 민디오니시오 신부. 올해 한국에 온지 45년째를 맞았습니다. 어느새 한국나이로 칠순입니다. 선교사이자 사제인 그는 “한국천주교회가 한평생 자신을 희생했던 외국선교사분들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며 “자신보다는 한국, 한국인을 더 사랑한 선교사들이 대부분이었다”고 말했습니다.

 

 

서울 동소문동 성골롬반외방선교회 한국지부에서 만난 민 신부는 특유의 넉넉한 웃음으로 인터뷰 내내 상대방 기분을 좋게 해줬습니다. 손님이 왔다며 직접 대문을 열어주고 주차까지 신경써주셨습니다. 이런 배려심이야 말로 낯선 타지에서 선교사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민 신부가 날이 추우니 얼른 들어가자며 서둘러 사제관으로 안내했습니다.  그리고 홍차와 커피를 내왔습니다. 홍차에는 우유를 타야 한다며 우유까지 직접 건네줍니다. 아일랜드인들은 홍차를 즐겨먹는다고 합니다. 45년의 세월, 선교사로 타지에서 살아가면서 어찌 어려움이 없었을까요. 그런데 민 신부는 “행복했던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그동안 한국에서 지내면서 특별히 기억에 남는 일이 있었는지 물었습니다. 추억들이 그의 머릿속에 스쳐지나가는 듯 이내 민 신부는 입을 열었습니다.

 

“신자들의 따뜻한 마음이 특히 기억에 많이 남습니다. 참 따뜻했어요. 그 온기가 지금까지도 제 마음속에 남아있습니다. 한국어를 잘 못해도 답답해하지 않고 늘 기다려줬습니다. 그리고 항상 웃어줬습니다. 아일랜드에서는 신자와 신부가 한국처럼 친밀하지 않습니다. 한번은 아일랜드로 휴가 갔을 때 미사를 집전하고 신자들에게 인사하러 나왔는데, 신자들이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았어요. 인사도 나누지 않고 바로 집으로 간 것이었죠. 어찌나 서운하던지…. 한국인들이 그리웠고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었습니다. 저도 한국인이 다 됐나봅니다. 그런데 요즘 한국인들, 정이 많이 사라진 것 같아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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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 신부가 추억을 떠올리다 재밌는 일이 생각났는지 살며시 웃으며 말했습니다. 민 신부는 그동안 광주대교구와 서울대교구 본당에서 사목활동을 해왔다고 합니다. “설이나 추석 같은 명절이 되면 서울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이 시골로 내려오곤 했는데, 한번은 아버지가 딸을 목마 태우고 동네에 나타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남자를 보며 동네 사람들이 다들 손가락질 했었습니다. 남자가 어디 할 짓이 없어 딸을 목마 태우고 다니냐고 아우성들이었죠. 농촌에서는 상상하지도 못할 일이 벌어진 것이었어요. 당시 농촌에서는 남편은 뒷짐을 지고 부인과 아이들 앞에서 걸어갔고, 아내는 아이들의 손을 잡고 짐까지 지며 그 뒤를 따라가곤 했었습니다.  당시에는 일상적인 가족들의 모습이었죠. 그러니 딸을 목마태운 남자가 얼마나 욕을 먹었겠어요. 그런데 한국도 이제 많이 변했습니다. 요즘 남자가 뒷짐 지면서 짐도 안 들어준다면 아마 여자가 이혼하자고 할 겁니다. 허허.“ 민 신부는 그동안 선교사이자 사제로 활동하다 선종한 동료들도 생각난다고 했습니다. 타지에서 희노애락을 함께 했던 동료들이었으니 얼마나 그리울까요. 그분들 중에는 고국에 돌아가지 않고 한국에서 선종하고 묻힌 분들도 많다고 합니다. 그도 건강이 허락하는 한 그러고 싶다고 했습니다.

 

 

20121221_4.jpg어느덧 45년 째, 이제 후배들도 한두 명씩 곁을 떠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후배인 류 디오니시오 신부가 선종했다고 합니다. 한 달 사이에 벌써 류 신부와 탁 프란치스코 신부가 선종했습니다. 민 신부가 류 신부의 추모사진을 건네줬습니다. 그리고 기도를 부탁한다는 말도 덧붙였습니다. “사제서품은 2년 후배였지만 나이는 저보다 많았습니다. ‘내가 나이가 많으니 형이라고 부르라’고 말하던 류 신부의 모습이 생각나네요. 그럴 때마다 저는 사제서품이 내가 더 빠르니 형이라고 부르라며 받아치곤 했었습니다. 허허” “류 신부는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연탄가스를 두 번 마시고 난 후에 머리에 이상이 생겨 6년 동안 투병하다 돌아가셨죠. 이제 그가 곁에 없다니 많이 섭섭합니다.”
민 신부가 사제관 입구 한 켠에 놓인 그의 사진을 바라봤습니다. 그리고 사진 속 류 신부를 보며 말했습니다.

 

“류 신부님, 이제 행복하시지요. 신부님과 한국에서 선교하면서 기쁜 일, 슬픈 일, 괴로운 일도 함께 겪고 이겨냈었지요? 이제는 모든 게 행복한 추억으로만 남아 있네요. 기억하시죠. 우리 아직 누가 형인지 결론을 내지 못했잖아요. 나중에 하늘나라에서 만나 누가 형인지 제대로 따져보자구요. 류 신부님! 그동안 한국에서 고생 많으셨습니다….”

 

 

 

 

글_사진 권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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