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시간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시간

우성모 알베르토 Albert Utzig 신부

성골롬반외방선교회. 미국 출신으로 1983년 사제품을 받고 다음 해 한국에 왔다.
서울 답십리, 목포 대성동, 전남 영암에서 본당사목을 했으며, 이후 신학생 양성 프로그램을 맡았고,
경기 이천 암산리에서 평신도선교사·수녀·사제 공동체를 이루어 유기농법을 실천하며
농촌사목을 했다.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주 성 베르나르디노 교구 성 마리아 본당 주임신부로
있으면서 교정사목과 교구의 JPIC위원회 활동도 하고 있다.

우성모 알베르토 신부(2019년 한국을 찾았을 때)

학생이던 1978년, 선교 실습을 하러 한국에 처음 왔을 때 도장이 필요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제 성이 “U”자로 시작하고 “우”로 발음하니까 우 씨로 정한 뒤, 제가 소띠이긴 하지만 소 우(牛)자 말고 벗 우(友)자를 써서 “우 알베르토”라고 새긴 도장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보좌신부 시절 본당 한국인 주임신부님이 성모(거룩한 모범)로 이름을 지어 주어서 우성모 신부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목포 대성동성당 주임신부 시절 교리교사들과 함께. 필자가 좋아했던 유달산이 보인다(1985년).

저는 선교 실습 기간에 만난 한국 친구들에게서 한국말 외에도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친구 야고보는 어학 수업을 마치고 나온 저를 데리고 탁구를 자주 치러 갔습니다. 고맙게도 매번 친구가 돈을 내주었는데, 한참 지나서야 저도 번갈아 가며 내기를 기대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식당에서 밥 먹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한국인 친구들은 저도 가끔 밥값을 내면 좋겠다고 말하기를 망설였지만, 저는 그것도 모르고 친구들이 베푼 인심을 그저 받기만 했습니다. 신부가 되고 나서야 돈이 더 많은 사람이 돈을 더 자주 내는 한국 풍속을 배웠고, 작은 것이라도 나누는 한국인들의 인심을 배우며 저도 기쁜 마음으로 대접할 줄 알게 되었습니다. 미국 사람으로서 자기 몫만 부담하는 데 익숙해져 있던 저로서는 깨우침을 얻고 너그러워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지금도 미국에서 친구들과 밖에서 만나면 밥값을 제가 자주 내곤 하는데, 그렇게 할 수 있어 아주 기쁩니다.

우 신부는 경기도 이천 암산리에서 유기농법을 실천하며 농촌사목을 하였다.

지난날을 돌아보니 강렬했던 장면 하나가 떠오릅니다. 목포에서 기차를 타고 광주역에 도착했는데 사방이 군인들과 매캐한 냄새로 가득했습니다. 광주 항쟁 한복판에 발을 들이게 된 것입니다! 굉장히 무서웠습니다. 최루탄 가스는 지독했고 사람들은 분노로 가득 찼습니다. 저는 죽거나 심한 상처를 입은 사람들을 많이 봤습니다. 군인들이 철수하고 도시가 시민들 품으로 돌아온 후에 저는 자유롭게 걸어 다니면서 광주 사람들이 서로를 신뢰하고 위로하며 음식을 나누는 광경을 목격했습니다. 그때 경험은 제 선교 활동에 많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저는 미국에서 중남미와 필리핀 출신 이민자들과 함께하고 있는데, 이들 중에는 미국으로 오기 전에 고국에서 폭력과 내란을 경험한 후 나쁜 기억을 안고 사는 이들이 많습니다. 지금도 그들 고국에는 범죄 조직과 경찰이 국민에게 폭력을 행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민자들과 모종의 연대감을 느끼며, 이들의 생각과 느낌에 더 가까이 다가가 공감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들과 마찬가지로 저 또한 엘살바도르의 위대한 순교자 성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를 영웅으로 여기게 되었습니다.

노동사목에 함께했을 때(맨 오른쪽은 오기백 신부)

제가 주임신부로 일하는 이곳 성 마리아 성당은 캘리포니아 폰타나에 있습니다. 신자들은 대부분 여러 나라에서 온 이주민들로 사용하는 언어도 다르고 세대도 다양합니다. 제가 목포 대성동과 전남 영암 본당 신부로 있으면서 했던 경험은 지금 사목에 도움이 되었습니다. 두 본당에 있을 때 성전과 사제관을 새로 지어야 해서 저는 외국에서 후원금을 받기도 하고, 한국에서도 이곳저곳을 다니며 호소하여 기금을 마련하였습니다. 건물을 짓기 시작한 것을 보고 저는 다른 곳으로 발령받아 떠났지만, 보람되고 기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 본당은 현재 오천 가구 넘게 등록되어 있고, 신자는 이만 명이 넘는 아주 큰 성당입니다. 그러나 창문도 없고 교리실도 없는 오래된 철골 대형 창고 성당이라서 이곳 주교님과 신자들은 새로운 성전을 짓기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모금 활동에 나서기 시작했습니다. 해마다 주말 축제를 개최해서 음식을 팔고 게임 등 이벤트를 열어 매년 1억 원 이상을 모았습니다. 1,200석 규모 성전을 짓기 위해 70억 원 가까운 돈이 필요하지만, 한국에서의 경험 덕분에 저는 두려움 없이 모금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사람들의 판단과 도움을 신뢰하는 법을 한국에서 배웠습니다. 우리 본당에는 깊은 관심과 열정으로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내어 주는 좋은 신자들이 많습니다.

기리암 신부와 등산

산이 많은 펜실베이니아 출신이라 그런지 저는 숲에서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한국에 있을 때도 동료 선교사들과 서울 북한산을 즐겨 올랐습니다. 전남 영암에 있을 때는 쉬는 날이면 혼자 월출산에 올랐습니다. 하루는 등산하다 말벌에 발등을 쏘였습니다. 발이 붓더니 숨을 쉬기도 어려워졌고, 걷지도 못해 드러누운 채 죽음을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죽음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캘리포니아 남부에도 3,000미터가 넘는 아름다운 산이 많아 쉬는 날에 홀로 등산을 갑니다. 평일엔 인적이 드문 편입니다. 산에는 큰뿔양, 사슴도 있고, 살쾡이, 퓨마, 방울뱀, 곰 등등 맹수도 사는데, 퓨마 말고는 다 한 번씩 마주쳐 봤으나 두려웠던 적은 없습니다. 두려운 게 있다면 발목이나 다리가 부러져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상황일 것입니다.

한국에서 선교한 경험은 제게 많은 자신감을 심어 주었습니다. 한국에서 보낸 20여 년이 제게는 진정한 축복이며 은총이었기에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것입니다.

필자가 사목하는 성 마리아 본당 교우들과 함께. 뒤쪽은 대형 철골 창고 성당이다. 해바라기와 교우들의 미소가 “누구나 환영합니다”라는 모토를 가진 본당 공동체의 따뜻한 분위기를 짐작하게 한다. 사진 제공: 우성모 신부

『골롬반선교』 2021년 여름가을호(통권 제119호) 26~27쪽

By |2021-10-07T16:24:11+09:002021-09-30|골롬반 소식, 선교일기|0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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