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성소 여정에 대해 – 심홍석 암브로시오 신학생

올해부터 성소국에서는 성소과정을 거치고 입회심사를 마쳐 현재 신학 생활을 하는 학생들의 생생한 후기를 실을 예정입니다.

이 후기들을 통해 보다 구체적인 선교사제의 삶의 시작을 알 수 있고 사제 성소가 일시적 호기심이나 현실을 도피하기 위한 수단이 아닌, 하느님의 계획과 부르심에 대한 적극적인 응답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나의 성소 여정에 대해

– 성소는 모험입니다.

저는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본당에서 청년 레지오 마리애에 입단했습니다. 그전까지 저의 신앙생활은 일주일에 한 번 주일 미사에 참석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신앙이 주는 기쁨을 느끼게 되었고, 본당 청년 회장님이 청년들이 활동하고 있는 단체를 소개해 주었는데, 그중 하나가레지오였습니다. 그렇게 저는 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아름다운 사람들과 보낼 수 있었습니다. 훗날 듣기로는 제가 입단한 그때가 저희 본당청년 레지오가 이제 막 활성화되던 시기였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 시절을 돌아볼 때면, 좋은 사람들과 좋은 때, 좋은 곳 삼박자가 척척 맞아떨어질 수있었던 것은 이제 막 그리스도인으로서 걸음마를 떼던 저에게 하느님께서 베풀어 주신 충만한 은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못해 미사를 가던 제가 덜컥 본당 활동을 시작하더니, 주일이면 오전부터 늦은 오후까지 미사 참례하고, 레지오 회합하고, 점심 먹고, 카페 가서커피 마시고 집에 들어오자, 부모님께서는 내심 걱정이 되셨었나 봅니다. 어느 날 저녁, 어머니께서는 저에게 신학교에 가는 것은 절대 안 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레지오 단원들과 함께 하는 시간이 행복했던 것이지 신학교에 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오묘한 방식으로 저를 이끄셨습니다. 지구 차원에서 청년 전례 축제가 있었는데, 저는 레지오 형, 누나들과 함께 준비팀에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전례 축제를 마친 날에 다 같이 뒤풀이를 하는데, 다른 본당 소속의 형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형은 자신이 어떻게 하느님을 만나고 또 그 사랑 안에서 어떤 변화를 겪었는지 나눠주었습니다. 그리고 머지않아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오상의 비오 신부님을 통해서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대해 알고 있었는데, 순간적으로 저도 이 형처럼, 비오 신부님처럼 하느님께 저를 봉헌하는 삶을 살고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카푸친 작은 형제회 성소 모임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물론 부모님께서 반대하실 것 같아서 비밀리에 나갔습니다. 그렇게 한 6개월 정도를 카푸친 작은 형제회 성소 모임에 나간 뒤, 가평에 있는 수련소에 다녀와서 ‘이곳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두 번째로는 예수회의 성소모임에 갔습니다. 제가 송봉모 신부님 책을 감명 깊게 읽기는 했지만, 예수회도 저의 집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마지막으로 염두에 두었던 것은 카르투시오나 트라피스트 같은 봉쇄수도회였습니다. 그러나 트라피스트 남자 수도회는 한국에 없고, 카르투시오 수도회는 경상북도에 위치해 있어서 비밀리에다녀오기에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먼저 다른 수도회의 성소 모임에 참석해 보기 위해 한국 남자수도회・사도생활단 장상협의회(brothers.or.kr) 홈페이지에 접속해서 각 수도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았습니다. 현재 장상협의회 홈페이지는 각 수도회 홈페이지로 연결해 주지 않지만, 당시에는 링크가 달려있었습니다. 하나하나 접속해 보던 중 골롬반외방선교회 홈페이지가 눈에 띄었습니다.

골롬반회는 수도회가 아니라 사도생활단입니다. 그러나 저는 사도생활단이 수도회와 무엇이 다른지도 몰랐고, 선교에 대한 관심도 없었습니다. 다만홈페이지가 전혀 존재하지 않거나, 홈페이지가 있기는 하지만 방치된 곳에 비해 골롬반회 홈페이지는 꾸준히 관리되어 온 흔적이 엿보였습니다. 그렇게골롬반회 성소 모임에 참석하면서 저는 아일랜드, 뉴질랜드, 미국, 호주 신부님들이 1933년부터 한국에 와서 살아오신 삶의 궤적들을 듣게 되었고, 오늘날 한국 신부님들이 한국을 떠나 세계 곳곳에서 선교사로 살아가는 모습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한국전쟁 직후 한국으로 파견된다는 것은 죽음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다고 합니다. 익숙하고 정든 사람들과 땅을 떠나서 들어보지도 못한 낯선 땅과 사람들에게 간다는 것은 1933년에는 물론이고 오늘날에도 여전히 용기를 필요로 하는 ‘모험’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모험이 제가 가진 기쁨을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가장 좋은 몫으로 보였습니다.

당시 성소 담당 신부님께서는 저에게 대학을 졸업하고 입회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권하셨습니다. 그러나 저의 대답은 “올인하겠습니다”였습니다. 지금 돌아보면 무모한 도전이었다고 할 수 있지만, 저는 그때 제가 가진 것을 다 팔아서 보물이 묻혀 있는 밭을 샀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후 입회 면접부터 신학교 입학까지의 과정은 수월한 과정은 아니지만 수월하게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부모님께서 저의 결정에 반대하시고 슬퍼하실까 봐 걱정했는데, 하느님께서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부모님의 마음을 설득해 놓으셨고, 부모님께서는 후회 없이 살아보라면서 흔쾌히 저의 결정을 지지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골롬반에 입회하고 나서도 저의 결정에 대해서 다시 돌아보게 되는 시간들이 몇 번 있었습니다. 그때 저에게 도움을 주셨던 분들이 계셨는데, 필리핀에서 영성의 해를 보내는 동안 저와 함께 하셨던 할아버지 신부님 한 분이 떠오릅니다. 제가 살아온 세월보다 더 오래 선교사로 사셨던 신부님께서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저에게 마지막으로 “암브로시오야, 네가 행복하다면 계속 이 길(선교사)을 걸어가거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경우에 따라서생전 처음 경험하는 언어를 써야 하고, 강도도 만나고, 전기도 부족하고, 수도시설도 열악한 곳에서 살아야 하는 등 여러 어려움을 마주해야 하겠지만“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초대에 “예”라고 응답하는 것. 힘들고 아픈 과정이지만 동시에 가슴 뛰는 모험이고 저의 행복입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골롬반 선교사로 살고자 합니다.

 

By |2021-07-15T11:29:16+09:002021-07-01|골롬반 소식, 성소국, 성소국 소식|0 댓글

골롬반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이웃에게 들려주세요.

Go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