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까지]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오기백 신부님과 함께

2014-01-27T16:48:37+09:00

작성자: 관리자등록일: 2014-01-27 16:48:22  조회 수: ‘5558’

*** 2014년 1‧2월호 「땅끝까지」에 게재된 글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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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골롬반외방선교회는 2013년 10월 29일 서울대교구 명동주교좌성당에서, 한국 진출 80주년을 기념하는 감사미사를 주교단, 골롬반회 사제단과 지원 사제단, 평신도 선교사, 후원 회원 등 900여 명이 모여서 거행하였다. 80주년 바쁜 행사를 마치신 한국지부장 오기백 신부님을 찾아 뵙고, 38년 동안 한국에서 선교사로 생활하신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20140127_01.jpg신부님, 80주년 기념행사로 바쁘셨죠? 신부님께서 한국에 오셔서 하신 일들을 연대별로 간략하게 말씀해 주세요.

 

저는 아일랜드에서 1975년 부활절에 사제서품을 받았어요. 같은 해 9월 한국에 올 예정이었는데, 지학순 주교님의 정의 구현 운동으로 정부에서 외국 선교사들에게 입국 비자를 발급해 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1976년 2월에 도착했습니다. 한국에서는 광주대교구 흑산동성당, 연동성당에서 보좌로 활동했고, 1980년 잠시 수원교구 상대원성당에 있다가 같은 해 12월부터 인천교구 부천에서 노동사목을 하였습니다. 1989년에서 1992년까지 본국에서 실천신학을 공부하였고,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1992년 4월부터 1998년 10월까지 서울대교구 봉천9동에서 도시빈민사목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1998년 4월부터 2004년 4월까지 한국지부 지부장을 역임했고, 2004년부터 2005년까지 안식년으로 고국에 다녀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잠시 페루와 칠레도 방문했습니다. 한국에 와서 2005년 4월부터 2010년까지 한국지부의 선교 홍보와 교육을 담당했고, 2010년 4월부터 지금까지 두 번째 한국지부장을 역임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 신부님께서 인천에서 노동사목을 하실 때, 한국사회는 격동기를 겪고 있었어요. 가장 인상 깊었던 사건을 이야기해 주세요.

 

노동사목을 했던 이 시기를 돌이켜보면 저는 복을 많이 받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노동조합과 JOC(가톨릭노동청년회), 노동문제 상담을 통해 좋은 사람들을 참 많이 만났습니다. 이 사람들은 어려운 조건에서도 더 어려운 동료들을 도왔어요. 이 사람들과 참 많은 일들이 있었지만, 한 가지만 이야기하겠습니다.
노동사목을 하면서 매주 목요일마다 저녁 때 모임을 갖고 미사를 드렸습니다. 말씀의 전례 때 강론대신 서너 명씩 그룹으로 모여 그날 복음을 중심으로 나눔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지금도 기억에 남는 사연은 산재를 당한 한 젊은이의 이야기입니다. 이 청년은 프레스 기계에서 오른쪽 손가락 3개가 잘렸습니다. 그날 복음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어 당신 상처를 만져 보라는 부분이었습니다. 젊은이는 영세를 받은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부활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어요. 지금까지는 부끄러워서 왼손만 내밀고 영성체를 모실 때도 왼손으로만 받았는데, 이제 자신 있게 오른 손을 내놓을 수 있다면 그것이 자신에게 부활이라고 말했습니다. 자유로워지는 것, 이제는 이 부끄러움과 두려움을 다 극복하고, 인간으로서 자신감을 갖고, 그런 삶을 살 수 있다면 진정한 부활의 의미를 알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어요. 저는 오랫동안 신학을 공부했지만 이처럼 감동 깊은 고백은 처음 들어봤어요. 이렇게 8~9년 동안 노동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그와 같은 체험과 깨달음을 많이 얻었어요. 저 개인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89년부터 92년까지 안식년을 맞아 본국에 가서 공부할 기회가 있었어요. 거기서 실천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지금까지의 경험을 토대로, 하느님께서 노동자들의 삶 속에서 어떻게 움직이시는지 신학적으로 정리해서 논문을 쓰고 석사학위를 마쳤습니다. 마치고나서 한국에 다시 돌아와서 98년까지 봉천동에 살면서 빈민사목을 했어요. 그 다음에는 주로 지부 내에서 활동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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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사목을 하실 때, 골롬반회에서는 한국교회 선교 사목 방향에 대한 논의가 있었나요?

 

골롬반회 활동의 방향에 대해서는 전체가 모여서 6년마다 총회를 엽니다. 회의 동안 지난 6년 동안의 선교 활동을 평가하고, 앞으로의 활동 방향과 전망을 결정합니다. 1970년대는 한국의 독재정치와 교회, 필리핀의 마르코스 독재, 남미에서도 군부 독재가 심각했습니다. 그런 배경에서 1976년 골롬반회 총회 결의문에서는 독재정치를 반대하고 억압받는 가난한 이들과 함께하자는 결의안이 있습니다. 1982년에는 그 결의안을 아주 세부적으로 명시했습니다. 총회를 마치고 각 지부로 돌아가서는 지부 모임을 통해 활동 방향을 잡았습니다. 1983년 봄 지부 모임에서는 소외된 사람들과 더 적극적으로 함께 하자고 했습니다. 이제는 한국교회가 많이 발전해서 자원도 많아졌고 사제도 많아져, 더 이상 골롬반 사제들이 본당 사목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겠는가 하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선교회의 목적은 교회를 유지시키는 것이 아니라 본회의 카리스마에 따라서 선교 활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약간의 내부 갈등이 있었어요. 본당 활동을 오래 하신 분들은 계속해야 한다고 하셨고, 젊은 사제들은 새로운 것을 해보자고 했습니다. 결정하는 데 어려움이 따랐는데, 결국은 두 가지를 다 하기로 했습니다. 각자에게 선택의 자유를 준 것이지요. 그때부터 다양하게 선교 사목을 했습니다. 그때 단 도박과 단주 교육, 선택, 등이 시작되었고, 어떤 활동을 하고 싶다고 하면, 허락을 하면서 본인이 책임을 지라고 했습니다. 지부가 지원을 하지만 잘 안 되면 결국은 본인이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래서 젊은 사제들한테 기회를 많이 주었습니다.

 

 

20140127_03.jpg토착화 연구도 그 일환이었나요?

 

그렇죠. 토착화는 지금은 한국에 안 계시지만, 당시 원하림(Sean Dwan) 신부님이 시카고에서 비교종교학 박사학위를 받으셨는데, 한국에 돌아와서 토착화에 대한 노력을 한 번 해보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 결과 80년대에 토착화 연구 센터를 설립해서 5년 동안 「Inculturation」 잡지를 내셨습니다. 그분은 한국에서 여러 사람들과 연대를 맺으시면서 특별히 연구하는 차원에서 자료를 많이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그 당시 지부장 신부님의 배려로 각자 선택했던 반면, 농민, 노동자들을 위한 특수 사목이 씨앗이 되어서 많이 발전되어 온 것이네요.

 

그래요. 그 당시 지부장 신부님이셨던 서 로베르토 신부님이 근래에 갑자기 돌아가셨지만, 특별히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많으셨습니다. 그 당시 달동네였던 신림10동에 신부님 둘이 들어가서 작은 집을 얻어 살았어요. 그러면서 교회가 주민들과 연대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다리 역할을 해 주었어요. 지부장 서 신부님도 주말에 가끔 미사를 함께 봉헌하시곤 했어요. 서 신부님은 사제들에게 선택의 기회를 주시면서 책임도 강조하셨습니다. 지금 서울대교구에서 하고 있는 공동사목을 서 신부님이 80년대 초 부산, 수원, 서울 세 본당에서 시작하셨는데, 당시 교구청에서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1998~2004년에 신부님께서 처음으로 지부장 신부님을 역임하셨는데, 그때 한구사회의 경제가 많이 나아졌잖아요? 변화된 한국사회에서 골롬반회의 선교 활동은 어떻게 하셨는지요?

 

15년 전인데, 그 당시 저희 한국지부에서도 한국 사제들이 탄생했고, 한국인 회원들도 생겼고, 해외로 평신도 선교사들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 수도회가 선교사들을 파견하는 한국교회와 어떻게 더 적극적으로 함께 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그래서 1999년 해외 파견 선교사들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처음으로 시작했어요. 그런데 교육 시설이 없어서, 정동 프란치스코회관과 종로성당을 빌려서 쓰다가 이 선교 센터를 그때 지었습니다. 당시 골롬반회를 위해서 필요한 시설이 있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98년부터 2004년까지 지부장으로 있으면서 골롬반회의 새로운 현실에 적합한 구조를 마련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현대사회는 외부의 박해는 없지만 오히려 자본주의의 영향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힘이 약해진 것 같습니다. 이에 대한 특수사목이나 영성교육이 있는지요?

 

자본주의는 보이지 않는 무서운 힘으로 사람들의 생각을 마비시키고 있습니다. 예전부터 알코올, 도박, 마약, 성 등의 중독이 있었지만 요즘엔 인터넷, 게임, 쇼핑, 아니면 텔레비전 중독까지 늘고 있습니다. 이런 중독은 사람의 정신을 완전히 마비시키고, 생각을 못하게 하는 아주 위험한 것입니다. 그래서 요즘 우리가 강조하는 것은 특히 양성 부분입니다. 골롬반회 신학생들, 평신도 선교사들, 예비 수녀님들과 함께 성찰 프로그램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관찰, 분석, 실천이란 세 가지 단계로 자기 모습을 성찰하는 것입니다. 수시로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왜 이런 활동을 하고 있는가,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 무엇인가, 왜 이렇게 하고자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2주일에 한 번씩 모임을 가지면서 자기 생활과 활동을 나눕니다. 다음 단계로는, 모든 선교사들이 개별적으로 영성 동반자를 만나게 하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자극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정해서 정기적으로 만나 상담하고 성찰하는 기회를 가지는 것입니다. 전요한(Sean Conneely) 신부님은 중독자들과 ‘12단계 프로그램’을 하고 계시는데 심각하게 중독에 빠진 사람들이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현 시대에 맞는 사목은 어떤 방향에서 찾고 계신가요?

 

먼저 골롬반회 자체가 많이 변했습니다. 이제는 사제들만이 아니라 남녀 평신도 선교사도 있습니다. 국적도 많이 다양해졌어요. 한국지부도 피지, 필리핀, 칠레, 한국, 아일랜드, 호주, 뉴질랜드 출신 회원들이 함께 살아요. 한국지부는 40명도 안되지만 다양성을 인정하면서 조화를 이루고 더 풍요로워질 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습니다. 한국사회도 다문화적으로 바뀌고 있잖아요. 우리 수도회가 다문화 가정들과 함께할 자신이 있습니다(웃음).

20140127_04.jpg다른 한 가지는 골롬반회 사제들이 본당에서 물러났기 때문에 조금 자유러워져서 새로운 것을 시도할 수 있는 기회가 많다는 것입니다. 물론 쉽지는 않습니다. 에너지가 필요하고, 창의성과 용기, 무엇보다 한국 문화를 잘 알아야 하거든요. 그래서 꿈 있는 젊은이들에게 확신만 있으면 한 번 해보라고 합니다. 골롬반회는 다른 나라의 골롬반회와 연대할 뿐만 아니라, 국제적 연대 차원에서도 동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인터넷을 통해서 필리핀지부의 태풍 피해 소식을 직접 들을 수 있었고, 줄 수 있는 도움을 즉시 논의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교회와는 평화운동, 비핵화운동, 제주도의 해군기지 건설에 대한 우려 표명 등에 함께 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받는 교회에서 주는 교회로 변화하면서 많은 선교사들을 해외에 파견하고 있습니다. 골롬반회에서는 일찍부터 해외 선교사 파견을 시작하셨지요. 해외 선교에 대한 특별한 기획은 무엇인지요?

 

1990년대에 평신도 선교사들을 해외에 파견했는데, 독신자들만 보냈습니다. 그런데 지금 칠레 산티아고에는 부부가 아이들과 함께 가서 선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천주교회에서 새로운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평신도 선교사는 임기가 3년인데, 20년 넘게 하신 분도 계세요. 그런데 단기 기획으로, 선교를 체험하고 싶어 하는 젊은이나 은퇴하신 분들을 위해 3개월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아직 시행하기는 어렵지만 지원하는 사람들이 많아 진지하게 연구하는 중입니다. 그 다음으로, 아일랜드나 프랑스에 좋은 예가 많은데, 오랫동안 선교 활동을 하다가 귀국한 선교사들이 고국에서 오랜 선교 경험을 바탕으로 새로운 일을 시작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선교사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는데, 주교님이나 수도회 장상들이 그러한 배려 없이 본당이라든가, 수도회의 책임을 맡깁니다. 따라서 귀국한 선교사들을 위한 적응 프로그램이 필요합니다. 선교사 자신도 변했지만 한국 사회도 엄청나게 변했거든요. 귀국한 선교사들에게 그들의 경험을 깊이 성찰하고, 무엇을 할 수 있는지 함께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어야 합니다. 이분들은 교회의 책임자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많기 때문에 그들에게 기회를 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적을 프로그램을 개발하려고 합니다. 아울러 중요한 것은 수도회 책임자들도 소속 회원들이 파견된 선교 현장을 자주 방문해서, 직접 보고 느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한국 속담처럼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될 수 있어요.

 

 

골롬반회의 카리스마를 열린 자세로 빠르게 시대에 적응시킨 것 같습니다.

 

그런가요? 그 배경에는 골롬반회가 모든 회원들에게 안식년과 재교육의 기회를 마련해 주었던 것이 큰 힘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조직이 커지면 변화도 힘든데, 한국지부는 예전에 비교해서 많이 작아졌고 교회 활동의 변두리에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우리 카리스마는 무엇인지 성찰할 수 밖에 없어요. 특히 골롬반 주보성인의 카리스마에 대해서 새롭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항상 제도 교회에 도전하고 새로운 것을 해보라는 그분의 정신은 큰 자극이 되고 있습니다. 또 지금 한국교회에서도 20세기 역사에 대해서 많이 연구하고 있잖아요. 우리 수도회에서도 특별히 6‧25 전쟁 때 돌아가신 분들의 정신을 되새기면서, 골롬반의 영성과 선교 정신을 다시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목포에 계셨던 오요한(John O’Brien) 신부님은 피난을 가지 않고 신자들을 위해서 남아 있다가 순교를 당했습니다. 오 신부님이 어머니께 보낸 편지를 읽으면서 많은 영감을 받았습니다.

 

 

한국에서 생활하신 선교사로서 어떤 감회를 느끼시는지요?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개인적으로 많은 것을 얻었고, 세상을 보는 눈이 많이 넓어졌다고 생각해요. 아일랜드에 가서 학교 동창들을 만나게 되면 내가 참 많이 달라졌다는 것을 새삼 느껴요. 특별히 빈민사목과 노동사목을 하면서 은혜를 많이 받았고, 지금도 그분들과 만나고 있습니다. 빠르게 변하고 있는 한국사회에 살면서 잘했다 하는 면과 부끄러운 면도 있습니다. 좀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결심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미약하다는 것을 느낍니다. 이제는 골롬반선교회의 카리스마가 젊은 사제들과 선교사들을 통해서 더 창의적으로 표현되도록 자리를 마련해 주려고 합니다. 골롬반회의 한국 진출 80주년 역사 사진 전시회에 참석하신 분들에게서 지금까지 알지 못했던 선배들이 삶에 대해 들으면서 감동도 받고 감사를 드렸습니다. 또한 80주년을 맞기까지 우리와 함께 하셨고, 지금도 함께 해 주시는 많은 분들에게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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