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까지] 임영준 에몬(Adams, Eamon F.) 신부님과 함께

2012-01-18T15:30:18+09:00

작성자: 관리자등록일: 2012-01-18 15:30:34 댓글: ‘1’ ,  조회 수: ‘6837’

*** 아래 기사는 교황청전교기구 한국지부에서 발행하는 「땅끝까지」2012년 1-2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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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목포대학교에서 종교학을 강의하시는 임영준 에몬 신부님을 찾아 숙소가 있는 광주광역시 쌍촌동으로 갔습니다. 거의 완벽한 신부님의 한국어 말씀에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셨는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신부님은 언제 한국에 오셨어요?
저는 북 아일랜드 출신으로 1984년 고등학교를 마치자마자 바로 성골롬반 외방수도회에 입회했습니다. 입회 후 5년 뒤에는 실습을 나가는데, 저는 브라질이나 일본에 가기를 원했어요. 그런데 총장신부님께서 한국에 가보는 게 어떻겠냐고 하셔서 오게 되었습니다. 저는 한국에 대해서는 6·25전쟁을 겪은 나라로만 알 정도로 거의 몰랐고, 88년 올림픽대회를 통해 TV를 보고 서울을 알 정도였습니다. 1989년 9월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한국은 생각보다 크고, 바쁘고, 사람도 많고 아주 활동적이었습니다. 저는 말을 한마디도 못하는 상태여서 보기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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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원이 있는 집 앞에서 매일 205번 버스를 타고 연세대 언어학당에 다녔는데, 지금도 기억이 나는 것은 그 버스를 볼 때마다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는 것입니다. 한국어를 배우는 게 너무 힘들었거든요. 정말 힘들었어요. 지금은 교통이 많이 좋아졌고. 다행히 그 버스 번호도 없어졌어요. 언어학당에는 저하고, 남 아일랜드 출신 신학생과 호주 출신 신학생이 있어서 셋이 함께 다녀서 재미있었어요. 우리 셋은 금요일만 기다렸지요. 수업이 끝나는 금요일에는 한국어에 대한 부담감에서 해방되는 기분과 함께 맥주도 한잔씩 마실 수 있었거든요. 9개월의 언어 실습이 끝나고 저는 성남에 있는 골롬반회 신부님이 계신 본당에 가서 함께 살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청년모임에서 시간을 보냈어요. 그러다가 목포에 있는 대성동 성당으로 갔습니다. 여기 본당에서도 제가 특별히 하는 일이 없었고, 그 주변에 절이 많아서 그 때부터 불교에 관심을 갖고 시간이 나는 대로 절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렇게 실습시간이 끝나고 저는 아일랜드로 돌아갔습니다.

그럼 한국 체류 동안 음식이나 문화에 대한 느낌은 어떠했나요?
처음 한국에서 음식 문제는 없었어요. 물론 아일랜드 음식하고 전혀 달랐지만 저는 먹는 것을 좋아해서 별 문제가 없었어요. 지금도 배가 이렇게 나왔잖아요. 그 때는 젊으니까 어떤 음식이든 모험하는 기분으로 가리지 않고, 의심하지 않고 무엇이든지 먹었어요. 맞지 않으면 다음에 안 먹으면 되니까요. 우리나라에서도 제가 좋아하는 음식이나 싫어하는 음식이 있는데, 모두 다 먹지는 않거든요.
문화적 차이도 별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제가 참여하는 곳은 젊은이들과 함께 하는 자리였고, 어쩌면 제한된 자리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사회라면 더 규칙적이고 딱딱했을 텐데, 등산도 다니면서 젊은이들과 같이 어울렸고 한국말 때문에 이들과 함께하는 데 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젊기 때문에 어떤 문제도 문제가 되지 않았고, 그냥 쉽게 넘어갔던 것 같습니다.

그럼, 두 번째로 언제 한국을 방문하셨나요?
남 아일랜드에 있는 골롬반회 본원으로 돌아가서 신학 과정을 마치고 93년 9월에 사제서품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1994년 말에 한국으로 왔습니다. 큰 부담이 없었고, 그냥 모험이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신학생 때하고는 많이 달랐습니다. 한국교회 신자들은 사제를 존경하면서도 또한 어려워하기 때문에 옛날처럼 인간관계가 자유롭지 못해서 힘들었습니다. 6개월 동안 서강대 언어학당에서 공부하며 저는 계속 고민했었죠. 한국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그 당시 우리 골롬반회에서 맡을 본당이 없어서 특수 사목을 해야 하니까 그런 고민을 했어요.
언어 공부를 마친 다음에, 광주에 살고 계신 안 패트릭 신부님에게 갔습니다. 안 신부님과 함께 살면서 무엇을 할까 의논하다가 도시빈민사목을 하기로 하고, 양동시장 쪽에 전셋집을 얻어서 살았어요. 시장에서 살면서, 회의도 참석하고, 본당에서 미사도 드리고 했지요. 지금 생각하면 재미있었어요. 우리 동네는 달동네여서 오토바이 타고 배달을 하는데, 길을 가르쳐 주는 것이 참 어려웠어요. 한국인에게 기본적인 것이 저에겐 참 생소해서 힘들었지요. 그래서 스스로 저한테 힘 좀 내라고 하면서 주문 전화를 하기도 했지요.
그렇게 안 신부님과 2년 동안 살면서 빈민사목을 했고, 다음에 안 신부님이 뉴질랜드로 돌아가셔서 저 혼자 살다가 그 때부터 타종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요. 그것도 원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죠. 이쪽에는 절이 많아요. 그래서 절을 자주 방문하다가 경험을 더 많이 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첫 번째 대원사에서 2개월 동안 살았어요. 다른 스님들과 같이 살았죠. 그 경험은 힘들었어요. 스님들의 수련이 제 몸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절에서 어떤 체험을 하셨나요?
절에서 지낸 경험은 참 좋았어요. 대원사 절뿐만아니라, 다른 절에서도 대부분 따뜻하게 대해 주었고, 안 좋은 경험은 극히 드물었어요. 저는 서적을 통해서 불교를 학문적으로만 알고 있었는데, 학문과 일상적인 것을 연결시키는 것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우리 가톨릭도 교리와 행동이 좀 다르게 드러나잖아요. 그래서 직접 보고, 직접 느끼고 하면서 실감이 났죠. 절에가서 저의 신분이 신부라고 밝히든 안 밝히든 문제가 없었어요. 불교에서는 천주교에 대해서 좋게 생각해요.
절에 있으면서 한국에 대한 여러 가지를 배웠는데, 개인적으로 재미있던 것은 절에 가끔씩 오는 신도와 나눈 대화였어요. 이 아주머니는 불교 신자였다가 천주교 세례를 받았고 다시 불교 신자가 된 분이에요. 사회 활동이 적다는 불교의 단점 때문에 천주교에 들어갔는데, 5년 동안 천주교 신자였다가 다시 불교에 돌아왔대요. 부활절, 성탄절에는 성당에 갔다가 평소에는 절에 온대요. 천주교는 영성이 약해서 다시 불교로 간다는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천주교에도 영성이 많은데, 본당에서 강론만 듣다가 그런 것 같아요.
대원사는 절이 크지 않아서 주지스님과 자주 마주치고 얘기도 많이 했어요. 스님은 참선에 대해서 숨쉬는 방법 등 가르쳐 주셨고, 그런 경험이 참 좋았어요. 책에서 배운 것이 아니라 직접 체험한 것이라 더 오래 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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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의 타종교 경험은 어떻게 계속되었나요?
저는 골롬반회에서 격려를 많이 받았어요. 에몬은 그쪽에 관심이 많으니까 계속하라고요. 그 당시 한국은 타종교와 대화가 좀 약했어요. 그래서 일본에 가서 6주 동안 돌아다니면서 타종교대화에 많이 참석하고, 새로운 것도 많이 보았죠. 무엇보다 대화하는 것에 관심을 두었죠.
절 방문하고, 회의 참석하고, 개인적으로 불교 서적 읽고, 스님과 대화하고, 그러다가 학문적 연구의 필요성을 느꼈죠. 그래서 저는 영국으로 가서 런던대학에서 종교학 석사, 박사 과정을 공부했어요. 박사 논문은 ‘일제시대 한국 불교의 혁신 운동’에 대해서 썼어요. 런던에서 논문 준비하는 동안 재미있었고, 서울에도 자료 찾으러 왔었죠. 박사 논문을 마치고, 당연히 한국에 다시 들어왔죠. 그 때는 다른 나라에 갈 생각이 없었죠. 그 동안 공부한 것을 활용하고 싶어서요.

그럼, 신부님은 세 번째 방문에서 어떤 것을 체험하셨나요?
박사 과정 마치고 2007년 10월에 들어왔는데, 세 번째 방문에서 제가 느끼는 한국은 전혀 달랐어요. 왜냐하면 신부로서 사회활동 경험의 폭은 좁아요. 그런데 박사 학위로 인간관계의 폭이 훨씬 더 넓어졌어요. 가끔 학회가 있으면 참석하고, 거기서 새로운 측면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게 되니 느낌이 훨씬 달랐어요. 정말 재미있었어요. 처음 타종교대화에 관심 있었을 때도 그런 모임에 참석했었지만, 박사 공부가 끝난 후에는 어느 학회에 저도 학자로서 들어갈 수 있다는 느낌이 아주 좋았어요. KCRP(한국종교인평화회의)의 모임에도 참석하고, 아는 사람도 많이 생기니 그 사람들을 통해서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당시 원불교 학자들도 많이 만났어요. 이렇게 첫 번째 신학생으로서, 두 번째 신부로서, 세 번째 박사로서 방문하여 체험한 한국 사회는 다 달랐습니다. 아직도 가끔 답답한 점이 있지만, 좋은 것은 한국이 엄청 빠르게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활동적인 나라죠.

신부님은 타종교대화에서 천주교의 존재감을 어떻게 알리시는지요?
아직도 타종교대화를 한 문장으로 정의하기 힘들어요. 간단하게 설명하기 불가능한 일이죠. 그래서 회의에 참석하거나 방문할 때 그냥 제가 하는 행동을 통해서 제가 믿는 것을 표현한다고 생각해요. 우리 천주교는 이렇게 생각한다고 말하기보다 타종교대화에서 기본은 상대방을 듣고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말하는 것보다 상대방의 얘기를 더 많이 들을 때 이런 자세를 통해 서로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말도 중요하지만 행동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타종교대화에서 안타까운 것은 회의에 참석하면 말이 많고, 실천은 부족하다는 것입니다.
가끔 회의 주제도 “세계 평화를 위해서 일합시다”와 같이 너무 광범위하게 정하는데, 좀 더 구체적으로 하면 좋겠어요. 예를 들어 가족 중에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종교 문제가 있어도 모르는 척하고 지나갑니다. 그래서 문제가 없는 것으로 봅니다. 사실은 우리 일상생활에서 세계 평화보다 가정의 평화가 더 중요하죠. 세계 평화는 말하기 쉽지만, 가정의 평화는 말하기 어렵죠. 바로 말하기 어려운 그 문제점을 인정하고 거기서부터 말해야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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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포대학교에서 종교학 강의를 하시면서 느끼신 점은?
학생들이 강의 중에 잠을 잘 자요. 사실 요즘 학생들은 종교에 관심이 없어요. 저의 목적은 학문적인 것보다 다른 종교에 대해서 더 넓게 생각하면 좋겠다는 것인데, 방법이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것도 있다는 것을 알리고요. 학생들마다 다르지만, 개신교 학생들이 자기 종교를 많이 알고 있어요. 불교 학생들은 많이 알거나 아주 모르거나, 천주교 학생들은 중간 정도만 알고 있어요. 아마도 교리 받은 실력인 것 같아요.
저는 외국인 입장에서 한국의 교육제도에 대해서 좀 의문을 가지고 있어요. 학생들이 입시 영향 때문에 가끔씩 보면 불쌍하다고 생각해요. 1,2학년의 교육은 암기식이예요. 마치 기억력 테스트 같아요. 철학이나 윤리학을 보면 자신의 입장을 발전시키고, 반대 입장도 표명하면 좋겠는데, 학생들은 교수가 말한대로 95% 그대로 반복해서 적어요. 그런 것을 보면 답답해요. 제가 강의할 때 “나의 의견은 이것이다, 너희의 의견을 말하라.”하면 학생들은 토론하는 것, 반대 의견을 제시하는 것을 못해요. 학생들은 똑똑하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 잘 표현할 것 같은데도, 제도 때문에 시험도 잘 봐야 하고, 점수도 잘 받아야 하니 깊은 사고를 할 여유가 없어서 그런 것 같아서 저도 가끔은 답답하죠.

앞으로 어떤 활동을 하실 계획이신지요?
종교간대화에 관심도 있지만 환경에도 관심이 있어요.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을까 생각해봐요. 가볍지 않은 문제인데, 요즘 종교는 환경에 대해서 말을 많이 하지만, 좀 더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봐요. 불교와 천주교가 환경 이야기를 하면 입장이 다르죠. 천주교와 개신교는 하느님이 이 세상을 창조하셨다고 하지만 불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죠. 우리에게 당연한 것이 힌두교나 불교에서는 다르니까요. 종교인으로서 환경에 대해서 권위를 가지고 말하려면 우리가 깊이 들어가서 연구해야 하죠.
종교와 바다. 저는 바다하고 친해요. 사실 한국에서도 바다와 관계된 샤머니즘은 있는데, 시간이 없어서 샤머니즘은 보류하고 있어요. 지금은 타종교대화를 계속하고 싶어요.

한국에 파견된 선교사로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제가 원래 한국에 오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한국 덕분에 저의 시야가 훨씬 넓어졌어요. 한국 덕분에 잘 살았고, 모험심도 많이 얻었죠. 만약 돌아가서 다시 선택한다 해도 한국에 오고 싶어요. 후회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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