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기사] 예수님의 휴가

2014-04-18T10:52:36+09:00

작성자: 관리자등록일: 2014-04-18 10:52:37  조회 수: ‘4209’

*** 2014년 「성모기사」 4월호에 연재된 글입니다. *** 

 

 

예수님의 휴가

 

 

 

양창우 요셉 신부_성골롬반외방선교회

 

 

 

겨울 방학이 끝나고 학생들이 신학원으로 모두 돌아왔다. 그런데 나는 다시 방학을 하고 싶은 마음이다. 왠지 모를 책임감이 더욱 드는 것은 나의 본성적 성향 때문일까? 그래도 나는 방학도 있고 휴가도 가질 수 있는데 예수님과 성모님은 잠시 숨 돌릴 틈도 없으실 것 같다.

 

하늘과 땅,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피조물의 요구와 하소연 그리고 고통의 소리를 듣고 계셔야 하는 예수님과 성모님은 어떠실까? 기쁨과 감사, 희망과 사랑에 가득찬 소리에는 행복하실 것이다. 하지만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많은 원망과 불평, 고통의 소리는 어떻게 감당하실까?

 

어제는 누군가 나에게 자신이 겪는 고통을 이야기하였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이었지만 함께 마음을 나누어 주었다. 그 전날에는 다른 사람의 아픔을 듣게 되었다. 고통을 대신하지 못하는 나에게는 힘겨운 얘기였다.

 

단지 몇 명 안되는 사람들의 고통을 들었을 뿐인데 전능하신 하느님과 복되신 동정 마리아가 짊어져야하는 십자가의 무게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어느 날 나이 많은 자매님이 고민을 이야기했다. “신부님! 결혼을 하고 싶어도 짝이 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짝이 없는 외로움의 고통 또한 보통 무게가 아닌 듯 싶었다. 그래서 배우자를 위한 기도를 주님께 바치면 좋겠다고 했더니 자매님은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주님께서 바쁘실텐데! 이런 일로 걱정 끼쳐 드리면 안되겠죠? 제 일은 제가 알아서 해야죠.”

 

얼마 후 그 자매님은 좋은 배우자를 만나게 되었다. 주님의 마음을 염려한 덕분에 주님께서 먼저 자매의 마음을 헤아리신 것 같았다. 자기 자녀에게 무엇이 필요한지를 먼저 아시고 더욱 좋은 것을 베푸시는 하느님의 손길이 느껴졌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이 겪고 있는 고통만을 들여다본다. 그것은 실제 겪는 고통보다 몇 배로 부풀려지기에 우리 자신은 더욱 지치게 한다. 그리고 자신이 고통 속에 있을 때는 다른 사람의 고통을 외면하기 쉽다.

 

신앙인은 이럴 때 예수님과 성모님의 고통을 묵상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주변에서 십자가의 고통에 눌려있는 이들을 위로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조류독감으로 수많은 닭과 오리를 잃은 농장주의 아픔은 어떠할까? 경주 리조트 지붕의 붕괴로 희생당한 학생들의 가족은 얼마나 괴로울까? 아프리카에서 굶어죽는 아이들과 전쟁의 공포로 신음하는 이들의 고통은 얼마나 비참할까?

 

그리스도의 지체를 이루는 우리들이 서로의 아픔을 나눌 때 예수님은 당신 손길로 우리의 눈물을 기쁨으로 바꾸시리라 믿는다. 그렇다면 매일 매일 인류의 십자가를 겪어내시는 예수님과 성모님의 고통을 위로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 삶의 무게와 고통 속에서도 감사를 드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언제, 어디서나, 어떠한 상황에서도 감사할 일을 찾고 찬미를 드리는 마음의 자세가 제일 중요하다.
우리들의 감사와 희망의 소리를 들으실 때 하느님과 성모님은 그 순간이 행복한 휴가일 것이다.

 

다미안 성인은 몰로카이 섬에서 나환자들의 아버지로 평생을 사셨다. 처음에 나환자들은 그를 자신의 형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래서 다미안 성인은 하느님께 간절히 청하였다. “저도 이들처럼 나환자가 되게 하여 주소서!”

 

그는 나환자들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그들과 같은 처지에 이르는 길을 택한 것이다. 아마도 하느님께 자신이 드릴 수 있는 감사의 기도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하느님께서는 이 기도에 얼마나 감동하셨을까?

 

그런데 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내가 겪는 고통을 없애 달라고 청하고 있는가? 아니면 원망과 불평을 늘어놓으며 나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허비하지는 않는가? 아니면 새로운 삶의 지평을 넓혀주는 차원의 신비를 향하여 가고 있는가?

 

얼마 전 친자녀에게 신체적 상해를 입혀서 보험금을 수령했던 부모의 이야기를 접하게 되었다. 보험금에 눈이 멀어 자신의 자녀를 불구자로 만드는 현실이 비참할 뿐이었다.

 

그래도 희망의 불씨를 끄지 않는 것은 상해를 입은 아이가 자신의 부모가 가난해서 범한 것이니 선처를 청하는 마음이었다. 어린 아이의 순수한 영혼이 나를 부끄럽게 만들었다. 지금 나는 얼마나 용서하며 사랑하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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