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루] 산으로 간, 제주 해녀의 아들 편지_부재환 프란치스코 신부

2024-05-16T09:23:17+09:00

어머니 전상서
– 산으로 간, 제주 해녀의 아들 편지

글  부재환 프란치스코 신부
제주교구 소속이며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지원사제로서 2021년 남미 페루로 파견되었다. 수도 리마에서 도시빈민사목을 하였고, 올해 초부터 고산지대 쿠스코 지역 시콰니 교구의 본당에서 사목하며 안데스 원주민들과 함께하고 있다.
『골롬반선교』 제127호(2024년 봄호) 20~21쪽

공소 어르신과 함께 ⓒ부재환 신부

그리운 어머니께!

군대 이후로 처음 어머니께 편지 올립니다. 전화 통화로 종종 연락드리지만 차분하게 깊은 얘기를 나누지 못해 못내 아쉬웠는데 이렇게 글로 제 소식 전합니다. 남미 해외 선교를 나온 지 올해로 3년이 됩니다. 2년 넘게 페루의 수도인 리마에서 안데스산맥으로 소임지를 옮겼습니다. 여기는 한라산 두 개를 올려놓은 약 4,000m 높이 안데스산맥에 있는 케회라는 아주 작은 마을입니다.

어제 높은 산길을 운전하고 오면서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났습니다. 광활하게 펼쳐진 산맥과 골짜기들을 보며 어머니가 바닷속에서 경험하셨을 또 다른 세상이 떠올랐습니다. 신기합니다. 산에서 바당내1가 나니 말입니다. 사실 이곳은 예전에 바다였다고 합니다. 멀지 않은 곳에 옛 종달리2 소금밭 같은 염전도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을 때 물속에 넣어 두셨다가 사람들이 살 수 있게 물밖으로 들어 올리셨나 봅니다.

이곳은 지대가 높아 산소가 부족해서 처음 온 사람들은 숨을 헐떡거리고 머리가 깨질 듯한 고산병을 앓습니다. 저도 처음엔 그랬지만 지금은 적응이 되어서 괜찮습니다. 두통이 올 때 어머니가 물질하며 겪으셨을 잠수병이 떠올랐습니다. 식구들 생계를 위해 그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몇 번이고 숨을 참으며 깊은 물 속으로 들어가셨지요. 어머니가 그 고통을 딛고 고된 삶을 이겨내신 것처럼 저도 이 고산병을 이겨내고 씩씩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이곳 예순 개 공소 형제들의 영적 살림을 위해 더 높은 산으로 올라갑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고통을 통해서 어머니와 저를 이어주십니다.

안데스 사람들의 주식인 감자와 옥수수 ⓒ부재환 신부

안데스의 감자와 콩 ⓒ부재환 신부

놀랍게도 이곳에서 제주도가 보입니다. 이 산길을 지나다 보면 들판에 유채꽃 닮은 놈삐꽃3이 만발하고, 청보리도 있고, 정겨운 밭담도 눈에 들어옵니다. 또 여기에는 지슬4이 천지입니다. 원산지가 바로 이곳이랍니다. 맛도 일품이고 모양도 종류도 가지각색입니다. 요즘 지슬 꽃이 곱딱하게5라왔습니다. 농사가 잘되지 않는 이 산중에서 지슬은 이곳 사람들의 구황 작물이자 주식입니다. 제주 사람들이 봄에 수확해 먹는 지슬이 이 멀고 높은 곳에서 왔다니 이들의 조상님들께 감사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필자가 사목하는 페루 안데스산맥 지역이다. ⓒ부재환 신부

ⓒ부재환 신부

ⓒ부재환 신부

ⓒ부재환 신부

이곳 사람들은 참으로 순박합니다. 마을을 지날 때 누구와도 반갑게 인사를 나눕니다. 처음 보는 동양인인 저를 반갑게 맞아주시고 모두가 저를 “아버지(빠드레, 빠빠)”라고 부릅니다. 아이들은 해맑고 모두가 푸른 자연을 닮았습니다. 제 어린 시절 모습과 다를 바 없습니다. 팔 벌려 인사하면 달려와 안깁니다. 산길을 가다 보면 양치는 아낙네와 목동들을 만납니다. 그리고 봇짐 진 여인네들을 자주 만날 수 있는데, 이들 뒷모습에서 구덕6을 지고 개끄시7를 오가던 어머니를 봤습니다. 이들이 모두 다 제 이웃이고 가족입니다.

어머니, 제주 해녀의 아들은 이렇게 산으로 갔습니다. 산으로 올라간 어부가 되었습니다. 사람 낚는 어부가 아니라, 사람 치는 목자가 되었습니다. 어머니가 이 말의 뜻을 알게 되실 때 하느님께서 내 아들을 이곳으로 보내셨다는 것을 깨달으실 것입니다.

필자가 공소 미사를 집전할 때다. 축복을 받으려고 신자들이 제대 앞에 올린 물과 수확물이 인상적이다. ⓒ부재환 신부

리마에서 선교 실습 중인 본회 이정락 베라노 신학생이 본당을 방문했을 때 ⓒ부재환 신부

ⓒ부재환 신부

ⓒ부재환 신부

대도시에 있다가 외딴 고산 지역으로 와서 새롭게 느낀 바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움’입니다. 리마에 있을 때는 향수를 느낄 새도 없이 일에만 열중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내 안에 피어나는 이 그리움은 외로움이 아니라 기쁨입니다. 감춰 있던 보물을 찾은 것 같은. 어머니에게서 들은 말 한마디, 어깨너머로 배운 가르침 하나하나가 소중한 삶의 지혜가 되고 있습니다. 어머니를 그리워함이 저에겐 큰 힘입니다. 그래서 계속 그리워할 것입니다.

얼마 전, 어머니가 거동이 힘들어져 정밀검사를 받으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이 높은 곳에서 어머니 건강을 위해 드리는 제 기도는 거대한 산맥을 넘어 좀 더 빨리 가장 높은 곳에 계신 분께 이를 것입니다. 그분께서 저를 대신해 우리 형제들과 함께 가장 낮은 곳에 계신 어머니를 찾아가 돌보아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저는 이 간절한 기도와 함께 이곳에 계신 수많은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 아버지들을 제 부모라 여기며 그분들을 돌보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곧 세 번째 봄이 다가옵니다. 유채꽃 향기 가득한 봄날에 잠시 ‘바다의 별’ 같은 어머니 품으로 돌아갑니다. 주님께서 우리 식구들에게 부활의 축복을 내려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안데스 산골짜기에서 막내 아들 올림

부재환 신부의 제주말 풀이
1. 바당내: 바다 냄새(향기)
2. 종달리: 어머니 고향인 제주도 어촌 마을 구좌읍 종달리
3. 놉삐꽃: 무꽃
4. 지슬: 감자
5. 곱딱하게: 예쁘게
6. 구덕: 대나무로 만든 바구니
7. 개끄시: 바다

공소 가는 길에 동료 선교사가 찍은 필자의 뒷모습 ⓒ부재환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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