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하반기 이현주목사의 수요특강] 7회 강의요약

2009-07-21T13:41:26+09:00

작성자: 관리자등록일: 2009-07-21 13:41:45  조회 수: ‘6299’

 

신앙은 예수가 인간으로 살았던 그 때의 발자취에 대한 믿음을 요구한다.그 발자취를 지금 여기에 있는 나도 경험하고, 그분처럼 나도 살아계신 하느님을 경험하는 것을 바라고 희망하는 것이다.
어제와 오늘이라는 시간 사이에 단절이 있는가? 이어져 있는 하나의 시간 속에 어제는 기억이고 내일은 기대라는 형태로 존재할 뿐이다. 단지 지금 여기 있는 오늘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 속에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이것이 영원한 생명이 아닌가!

그러므로 어제의 쓸데없는 일이나 자랑 때문에, 또 내일의 기대나 두려움 때문에 오늘 내가 해야 할 일을 못한다면 잘 사는 것이 아니다. 가장 잘 사는 사람은 가장 짧은 순간을 사는 사람이고, 영원한 생명을 사는 사람이다. 순간이 아주 짧아질수록 어제와 내일이 현재의 나를 다스리지 못한다.

참회와 후회의 차이점!
딱 한 번해보고 아는 것이 참회이고, 두고 두고 하는 것이 후회이다.
이현주 목사가 강원도 철원의 산골 교회에서 목회를 하던 시절, 어느 한 밤 중에 교회를 찾아 온 한 노인과의 만남을 통해 스스로가 바로 ‘소경이고 벙어리’ 라는 사실과, 하느님께로부터 ‘용서받았다’ 것에 대하여도 불신을 가지고 있었음을 체험했다. 한 번의 진실된 참회가 있었다면 후회로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힐 필요가 없다.

인생을 살다보면 많은 문제들이 있다. 문제는 항상 복잡하고 또 복잡하지 않으면 문제가 아니다. 마스터키(master key)는 주인이 가지고 있으며 그것 하나면 모든 것을 열 수가 있다. 내 인생의 주인은 누구인가?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일 수 있으나 내 인생을 맘대로 못한다. 그래서 내 안에 계신 진짜 주인을 만나고 모든 문제를 풀어갈 수 있는 마스터키를 받아라.

이현주 순간의 삶을 즐기는 삶에서 좀 더 ‘의미있는 어떤 일’을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질문에 이렇게 말한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egoist 만이 살고 있다(달라이라마).
그 하나는 현명한 egoist로 저보다 남을 챙겨서 남도 살리고 자기도 사는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바보같은 egoist로 남보다 저를 챙겨서 남도 망하고 저도 망하는 사람이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그 일이 정말 나를 편하게 하는가? 나와 다른 사람에게 이익이 되는가 해가 되는가?를 살펴보고 실천하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이런 생각들과 갈등을 겪으면서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갈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가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내 안에 사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인간의 가장 최고의 착각은 ‘독립된 나’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 착각을 깨닫는 것이 종교적 이슈이다.
‘물이 담겨져 있는 컵’과 ‘컵에 담겨져 있는 물’ 중 어느 것이 진실인가?
물을 위해 컵이 있는 것이다. 컵이 없어져도 물은 있다.
내 안에 담겨져 있는 물. 성령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내가 하느님의 영이라고 깨닫게 되면 경계가 없어진다.
‘밖’도 없고 ‘안’도 없는 것, 즉 ‘나’라는 것이 없어지고 종교적 깨달음의 정점인 ‘무아(無我)’에 이르게 된다.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창설자인 방류룡 신부님은 수도자들이 성덕에 이르는 길을 다음과 같이 가르친다.

점성정신(點性情神)으로 일상의 매순간을 성화(聖化)한다.
하느님과 합일하는데 방해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죽이고 없애고 부정하는 이 침묵의 길을 걸어야 하므로 일상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침묵을 실천할 수 있도록 침묵(沈默)을 가르친다.
대월(對越)은 말 그대로 영혼이 현실적인 모든 것을 떠나 하느님을 대면하는 것이다.
면형무아(麵形無我)란 성체 축성으로 밀떡의 실체는 없어지고 그 형상만 남은 무(無)인 면형에 그리스도께서 오시어 면형이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가 되듯이 내 인간적인 본성이 없어진 무아(無我)에 하느님께서 오시어 하느님과 내가 하나됨을 말한다.
이 면형무아(麵形無我)에 도달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법이 있으니 바로 점성정신(點性情神)으로 일상의 매순간을 성화(聖化)하면서 침묵 속의 여정을 걸어 마침내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사랑으로 사는 대월생활(對越生活)을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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