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하반기 황종렬박사의 화요특강] 3회, 4회 강의요약

2009-07-21T11:46:29+09:00

작성자: 관리자등록일: 2009-07-21 11:46:25  조회 수: ‘6279’

 

세번째 강의요약 “역사속의 평신도 : 황사영과 정약용”
(아래 내용은 황종렬 선생의 강의록에서 발췌한 내용입니다.)

황사영과 정약용

황사영
황사영은 정약현의 큰딸과 결혼하면서, 정약전, 약종, 약용 형제들과 접촉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천주교를 만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는 1790년 무렵 처음으로 이승훈에게 서학 서적들을 빌려 보면서 천주 신앙에 눈을 뜨게 되었고, 1795년에 조선에 입국한 주웬모 신부에게 알렉시오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았다. 황사영은 세례를 받기 이전에부터 천주를 세상에서 구원할 “良藥” 내지는 “正道”로 인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서학을 비판하는 사람에 의하여 “절친한 인척 약종과 가까운 친척 승훈을 따라 과거를 폐지하고 오로지 사학을 연구하며 밤낮으로 얼굴이 누렇게 뜰 정도로 공부하였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서학 연구에 진력하였다(눌암기략 참조: 교회사연구 13, 85, 86).

정약용
정약용은 다 아는 것처럼 한국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이다. 오늘의 우리가 갖고 있는 “여유당전서” 전질을 번역하면 약 70권쯤 되는데, 그는 이 방대한 분량의 저서를 통하여, 문학, 사회, 정치, 문화, 의학, 농학, 철학, 등 거의 모든 인간 생활 영역에 걸쳐 자신의 이해를 피력하였다.
제사 금지 문제로 정약용은 교회를 떠나기도 하였지만, 마침내 1801년 신유년 대박해로 하여 정약용은 18년에 걸친 오랜 유배살이를 해야만 하였다. 이를테면 정약용은 당대에 이미 최고의 선진 문화 현상을 대변하는 위치에서 개방적인 학문 풍토를 열지 못한 채, 진리의 길로 믿고 따랐던 것이 외국에서 온 것이라는 이유로 자신의 40대와 50대를 유배지에서 지내야 했다. 그후로도 그는 죽기에 이르기까지 초야에 묻혀 살아야 했던 것은 물론이다. 당대의 한 위대한 선진 문화 현상으로 존재한다는 이유로 그는 이렇게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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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번째 강의요약 “안중근의 저항과 존중: 교회 관상의 한 모델”

일본 박해시기에 그림과 같은 십자고상 판을 만들어, 그 위를 밟고 지나가면 그리스도교 신자가 아님을 증명하도록 하였다.

밟히신 예수그리스도여, 세상을 하느님께 이은 다리시여!

<그림: 주천마을 섶다리>
강원 영월군 주천면에는 주천강과 평창강이 흐르고, 이 두 물줄기가 만나 서강이 되어 서면의 선암마을을 지난다. 겨울 무렵 서강을 건너도록 선암마을에 섶다리가 놓이는데, 이 다리가 선암마을과 주천면을 이어준다. 갈라진 참나무로 다리목을 세우고, 낙엽송 장대로 이어서 그 위에 소나무 가지를 깔고 이 위에 다시 흙을 덮어 만들어서, 여름 장마로 떠내려갈 때까지 두 마을을 잇는 임시 다리 구실을 한다.

교회와 사회를 잇는 다리가 된 안중근. ‘안중근의사 자서전’이 천(天)으로 시작하여 천은(天恩)으로 끝나는 것을 통해 그의 신앙의 깊음과 단순한 아름다움을 보게 된다.
황종렬 선생은 이 자서전 안에서 안중근이 자신의 신앙의 내용을 열거해 놓은 부분을 “안중근편 교리서”라고 이름 붙인다.

안중근은 감옥이라는 삶의 자리에서 옛 선교를 발설하던 때의 자리를 기억하며 신앙고백을 한다.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 관한 부분에서,
세상 罰(벌)은 몸을 다스릴 뿐 마음을 다스리지는 못하지만,
천주의 상벌은 이 모두가 가능하다는 교리 등 예수그리스도와 교회에 관하여도 적는다.
안중근은 선포 목적을 ‘모든 동포들이 크게 깨달아 도덕시대로, 태평을 누리다가 무궁한 영복을 함께 누리기를 바란다’고 남긴다.

교회를 목표로 삼지 않고 다리로 삼아 태평으로 영복심으로 온 민족이 지나갈 수 있도록 하려는 안중근의 뜻을 본다. 그의 하느님중심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신앙심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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