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골롬반 선구자들!_오기백 다니엘 신부

2023-12-21T17:58:17+09:00

글 오기백 | 성골롬반외방선교회. 1975년, 아일랜드에서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한국에 왔다. 광주대교구에서 본당사목을 하였고, 1980년부터 인천교구 부천 노동사목과 서울대교구 봉천9동 도시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하였다. 한국지부장,신학원장을 역임하였고, 한국지부 역사실을 담당하면서 선교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다. 2021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올해의 이민자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대구에 도착한 직후 주교좌계산성당 성모당 앞에서(1933년 10월 29일). (앞줄 왼쪽부터) 나 토마스, 임 오웬, 안세화 주교, 손 파트리치오, 모 파트리치오, (뒷줄 왼쪽부터) 현 헨리, 서 예로니모, 매 제랄드, 지 벨라도, 간 토마스, 명 다니엘

1933년 10월 29일, 첫 번째로 한국에 파견된 골롬반회 선교사들이 도착했다. 대구교구장 안세화 주교(파리외방전교회)로부터 요청을 받은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은 전라남도에서 일할 선교사 파견을 골롬반회에 제안하였고, 본회는 이에 즉각 응답하여 첫 팀으로 10명을 한국에 보냈다. 8명은 아일랜드 출신, 1명은 미국, 1명은 호주 사람이었다. 아홉 명은 함께 아일랜드에서 공부한 후 1932년에 사제품을 받았고, 한 명은 골롬반회 창립 후 첫 선교사 그룹의 일원으로 중국에서 12년간 활동한 임 오웬(맥폴린) 신부다. 상하이에서 합류한 이들은 대구에 도착해 안세화 주교의 환영을 받았고, 6개월 동안 대구 성 유스티노 소신학교에서 생활하며 한국 문화와 언어를 배웠다.

1934년 부활절에 이들은 전라남도에서 사목하던 6명의 한국인 신부들의 보좌로 발령받았다. 임 오웬(Owen McPolin), 모 파트리치오(Patrick Monaghan) 신부는 목포 산정동, 현 헨리(Harold Henry) 신부는 노안, 매 제랄드(Gerard Marinan) 신부는 광주 북동, 지 벨라도(Berard Geraghty) 신부와 간 토마스(Tomas Neligan) 신부는 순천 저전동 그리고 손 파트리치오(Patrick Dawson) 신부와 서 예로니모(Jerome Sweeney) 신부는 제주 중앙, 나 토마스(Thomas D.Ryan) 신부와 명 다니엘(Daniel Mc-Menamin) 신부는 서귀포 홍노에 배치되었다. 1937년 11월에 명 다니엘 신부는 폐결핵으로 28세에 별세하여 한국에서 죽고 묻힌 첫 번째 골롬반 선교사가 되었다.

명 다니엘 신부. 그는 한국에서 죽고 묻힌 첫 골롬반 선교사가 되었다. 왼쪽 아래는 광주대교구 담양 천주교 묘원 내 명 다니엘 신부 묘지다. (사진 제공: 이세미)

일제강점기는 선교사들의 삶과 활동에 막대한 영향을 행사했다. 경찰 감시하에 이동할 때마다 당국에 보고해야 했으며, 신자들은 외국인 선교 사제들에 관하여 경찰로부터 지속적인 질문과 조사를 받았다. 1941년 일본이 세계대전에 가세할 때 중립국이었던 아일랜드 출신 선교사들은 가택연금을 당했고, 적성국으로 분류된 미국과 호주 출신 선교사들은 본국으로 추방당했다.

일제강점기, 가택 연금 당시

독립유공자 나 토마스, 손 파트리치오, 서 아오스딩 신부의 건국훈장

한편, 제주에서 활동하던 나 토마스 신부, 손 파트리치오, 서 아오스딩 신부(Augustine Sweeney 서 예로니모 신부의 동생, 1935년 한국 파견)가 1942년, 항일운동으로 기소되어 형을 받고 투옥되었다. 손 파트리치오 신부는 광복이 되어서야 감옥에서 나올 수 있었다. 1999년 8월 15일, 이 세 명의 선교사는 독립유공자로 선정되어 대한민국 건국훈장을 받았고 오늘날까지 항일운동을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유일한 가톨릭 사제들이다.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에 나 토마스 신부는 제주로 피난온 서울 신학교의 학생들과 교직원들을 자기 본당에 머물게 했다. 그는 대부분 삶을 서귀포에서 보냈고, 1971년에 64세로 선종하여 제주에 묻혔다. 손 파트리치오 신부는 1970년까지 한국에서 활동한 뒤 미국으로 파견되었다.

(왼쪽) 나주성당 내 현 헨리 대주교 기념관, (오른쪽) 레지오 교본 번역 작업 때 현 헨리 대주교와 한공렬 대주교

임 오웬 맥폴린 몬시뇰


임 오웬 신부는 1937년 광주지목구장으로 임명되었고 1939년에 선교사들을 강원도에 파견하였다. 그는 춘천교구의 최초 교구장(당시 지목구장)으로도 임명(겸임)되어 교구 설립의 초석을 다졌다. 1941년부터 1945년까지 이어진 가택연금으로 지친 상태에서 광복 후 본국에 휴가를 갔다가 모든 직책에서 사임하고, 미국과 아일랜드에 가서 골롬반 신학생 양성에 전념했다.

광주대교구 장성 본당 재임 시절의 지 벨라도 신부

서 예로니모 신부

매 제랄드 신부(앞줄 가운데) 한국으로 파견된 후배 선교사들과 함께

광주 북동성당 신축 때 모 파트리치오 신부

간 토마스 신부

전남 나주성당의 초대 주임이었던 현 헨리 신부는 당시 일본의 적국인 미국 시민이었기 때문에 1942년에 추방되었다. 1947년 복귀하면서 광주교구 총대리로 임명되었고, 훗날 광주대교구의 첫 대주교가 되었다. 그는 많은 수도회를 광주대교구에서 일하도록 초청했으며, 한국에 레지오 마리애를 도입하였고, 한국의 두 번째 신학교를 광주에 세웠다. 1971년 교구장에서 사임한 후 같은 해 제주교구의 초대 주교가 되었으며 1976년에 66세로 선종, 제주 땅에 묻혔다. 지 벨라도 신부는 전남 장성의 최초 신부였으며, 나중에 강원도에 가서 횡성과 홍천에서도 사목하였다. 1949년에는 골롬반회 한국지부 초대 지부장에 임명되어 지금의 한국지부 본부 자리를 매입하였다. 또, 몇 개 본당을 서울에 지었다. 돈암동 본당(성북구 소재)을 제일 먼저 세웠고, 왕십리와 장위동에서는 본당을 설립하고 초대 주임으로 선교했다. 그는 1974년에 64세로 아일랜드에서 갑자기 별세하였다.

간 토마스 신부는 평생을 강원도에서 활동하였다. 휴전 직후인 1954년에 강릉 임당동성당을 새로 짓는 데 매진하다 과로로 쓰러져 다시 일어나지 못하고 45세에 세상을 떠나 성당 길 건너 갈바리의원 구내 땅에 묻혔다. 2020년, 임당동성당은 100주년 기념미사를 봉헌하면서, 성당 마당에 간 토마스 신부 석상을 세우고 축복하는 예식을 거행했다. 모 파트리치오 신 부는 일제강점기에 강원도 홍천 본당 사제관에 연금 당했을 때를 제외하고 광주교구에서 평생을 보냈다. 목포 산정동 주임 시절에 얻은 병환으로 1951년 7월, 치료차 미국에 갔으나 그해 11월에 41세로 눈을 감았다. 매 제랄드 신부는 광주 북동 본당, 강원도 원동, 죽림동 본당에서 일했지만 1941년 초 건강 상태가 나빠져 미국으로 갔다. 이후 미국과 아일랜드에서 활동했다. 1942년에는 서 예로니모 신부가 고국 호주로 송환되었고 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마자 일본으로 파견되어 평생을 그곳에서 선교했다.

이 땅에 맨 처음 파견된 골롬반 선교사들을 생각할 때면 “삶이란 날의 길이가 아니라, 그 나날을 어떻게 사용하는지로 측정된다.”라는 속담이 떠오른다! 이들 중 대부분은 젊은 나이에 선종하여 선교 생활이 길지 않았지만, 20세기 초반 한국의 고통을 함께 겪고 나누며 그 시기에 한국 교회의 성장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 이들이 하느님과 함께 평안히 쉬기를 기원한다.

오기백 다니엘 신부 | 성골롬반외방선교회. 1975년, 아일랜드에서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한국에 왔다. 광주대교구에서 본당사목을 하였고, 1980년부터 인천교구 부천 노동사목과 서울대교구 봉천9동 도시빈민사목 현장에서 활동하였다. 한국지부장, 신학원장을 역임하였고, 한국지부 역사실을 담당하면서 선교프로그램을 지원하고 있다. 2021년에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올해의 이민자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사진은 간 토마스 신부 묘소(강릉 갈바리의원 내 위치)를 방문했을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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