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길에서 봉성체라니요!

지광규 대철 베드로 신부 / 골롬반회

성골롬반외방선교회. 2016년 9월 사제품을 받았고, 필리핀으로 파견되어 마닐라의 말라떼 성당에서 보좌신부로 일하고 있다.

저는 필리핀 마닐라에 있는 말라떼 성당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치유의 성모 성당(Our Lady of RemediosCatholic Church)이라고도 불리는 이 성당에는
3명의 필리핀 신부, 아일랜드 신부 3명, 한국인인 제가 있습니다. 신부들이 왜 이렇게 많냐는 질문을 듣는데,
이곳은 마닐라에서 오래된 성당 중 하나이며 필리핀 가톨릭 신자에게 중요한 의미가 있는 성당입니다.
주일미사가 열한 대, 평일에는 세 대의 미사가 봉헌되고, 많은 활동이 이루어지는 곳이기도 합니다.

말라떼 성당은 약 430년 전에 스페인에서 온 아우구스티노 수도회가 지었습니다. 이어서 구속주회가 맡았고,
1900년대 초반부터 골롬반 선교사들이 활동하고 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지역 주민들이 학살되었는데
그때 본당에 있던 골롬반 사제들도 함께 죽임을 당했습니다. 성당 마당에 세워진 피에타상은 이들의 순교를 기리는 동시에
말라떼 신자들과 골롬반 선교사들의 유대를 상징하기도 합니다. 신학생 때 일 년간 생활했던 본당이라 익숙하면서도
날마다 새로움을 느끼며 지냅니다.

필자가 사목하는 말라떼 성당의 피에타상

그날도 새로운 만남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봉성체가 있던 어느 날, 동행하는 신자가 13살 아이 먼저 봉성체해 주기를 원하였습니다.
아이는 결핵, 암 게다가 신체장애까지 있어 휠체어에서 생활하고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성당 문을 나서고 3분쯤 걸었을까, 함께 가던 교우들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 아이는 엄마와 길에서 사는 아이였습니다. 이름은 마르코,
13살이지만 너무나도 작고 말라버린 몸으로 힘없이 앉아있었습니다.
저는 많이 당황했습니다. ‘오! 하느님, 길에서 봉성체라니요.’
평소에 봉성체하러 갔던 곳은 볼품없고 위생이 좋지 못해도 지붕이 있는 집이었습니다.
길에서 봉성체를 하게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도시의 소음에 노출된 상태에서 저는 기도 소리가 들리지 않을까 큰 목소리로 소리치듯 기도문을 읽어 내려갔습니다.
처참하고 극빈한 상태, 병으로 고통받는 이 작은 아이의 모습에 너무나 먹먹해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 상황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지요.
‘하느님 당신께서는 그토록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왜 이렇게까지 비참하게 두시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원망도 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아이와 함께 바치고 난 후, 저는 “까따완 니 크리스토(타갈로그어로 그리스도의 몸)”라고 말하고
아이에게 성체를 건넸습니다. 속으로는 ‘거의 다 끝나가는구나’ 생각했습니다.
무심하게 길에서 자고 있는 아이 엄마, 또 그 옆에 살고 있는 젊은 엄마와 우는 아이들, 거리의 소음, 무심히 지나가는 사람들
그리고 한 외국인 신부가 영대 를 메고 있는 모습…. 어쩌면 빨리 그 순간이 지나가기를 바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영성체를 하는 그 순간, 마르코의 얼굴이 아주 밝게 빛났습니다.
저는 너무 당황하기도 했고, 약간의 죄책감도 들었습니다. 놀라움은 더 컸습니다.
하느님의 얼굴이 바로 그곳에, 그 아이의 얼굴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자주 그렇게 사람들을 놀라게 하시는 것 같습니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고 누구도 모르는 그 순간, 우리 생각의 한계를 벗어나 당신의 모습을 비추어 주십니다. 찰나의 순간에 말이지요.
우리는 그 순간 모든 것을 얻게 되고, 기쁨과 위로를 받습니다. 저는 멍하게 아이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고,
아이는 해맑게 저를 보고 웃어 주었습니다.
봉성체 기도가 끝나자 마르코는 수줍으면서도 미안한 표정으로 제가 들고 있던 휴대용 선풍기를 줄 수있냐고 물었습니다.
선물로 받은 것이지만 망설이지 않고 주었습니다.
찌는 듯이 뜨거운 길 한가운데에서 잠시라도 더위를 피할 수만 있다면 선물을 준 이도 기뻐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날 봉성체를 모두 마친뒤, 한 봉지의 빵을 들고 다시 마르코를 찾았을 때는 비가 오고 있었습니다.
엄마는 아이를 손수레 위에 옮겼고, 비를 맞지 않게 하려고 천막으로 가려 놓았습니다.
습한 날씨와 땅에서 올라오는 열기 때문에 아이는 힘들어했습니다.
하지만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분의 현존은 우리가 기대하지 않았던 순간에 자주 나타납니다.
우리는 특별히 미사의 신비를 통하여 작은 빵으로 우리에게 오시는 하느님을 만납니다.
이 세상에서 그분보다 더 낮은 곳에 있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하느님의 얼굴을, 그분의 현존을 잊어버린 채 살아가기도 합니다.
종종 그 길을 지날 때면 마르코가 저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어 줍니다.
아이의 작은 몸짓과 환한 웃음은 제 안에 새겨진 하느님의 사랑과 하느님의 얼굴을다시 깨닫고 기억하게 해줍니다.

부활대축일 미사 후 본당 청년들과 함께

2019-01-22T15:54:57+09:002019/01/22|골롬반 소식, 공지사항, 선교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