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과희망] 가난한 사람이 되어버린 사제 – 안광훈 신부와의 ‘만남’

가난한 사람이 되어버린 사제 – 안광훈 신부와의 ‘만남’

대담 및 정리: 오민환 <기쁨과희망> 편집장

출처: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발행 <기쁨과희망> 제23호(2019년 여름호) 120쪽~137쪽

TV에 나온 삼양동 동네 이야기

동숭동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에서 돈암동 성골롬반외방선교회까지는 멀지 않다. 지하철로 두 정거장이면 충분하다. 여태껏 ‘만남’을 진행하면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의 만남이었다. 유월의 햇볕이 따갑던 늦은 오후, 한옥 대문이 보이는 골롬반선교회 건물로 들어섰다
3층 집무실에 있던 안광훈(Robert John Brennan) 신부는 좀 더 넓은 장소로 가자며 회의실로 안내했다. 그는 요즘 인터뷰 일정으로 바쁘다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안 신부 인터뷰를 준비하다가 흥미로운 동영상을 보았다. 작년 크리스마스 때쯤 방영된 KBS의 다큐 프로그램 ‘김영철의 동네 한 바퀴’ 삼양동 편이었다. 안 신부가 이사장으로 있는 삼양주민연대가 독거 노인을 위한 성탄 선물을 준비하는 모습이 감동적 영상으로 잡혔다. 성탄을 앞두고 시청자들이 훈훈한 마음을 느꼈을 것으로 짐작되었다. 그 프로그램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자, 안 신부는 뒷이야기를 전해줬다. “그거 다 짜고 한 거예요. 1시간 가까운 프로그램에서 약 10분 정도 나와요. 그런데 이틀 동안 8시간 촬영했어요.” 쑥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면 말하는 안 신부를 보면서, 당시 영상에 잡힌 안 신부의 표정 역시 어색했었다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아름다운 연출이었다. 안 신부는 연출된 표정을 잘 만들어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감정이 드러나는 표정을 숨기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바로 안 신부는 삼양동에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지역 조직을 전해주었다.
“삼양동에는 솔샘공동체하고 삼양주민연대가 있어요. 솔샘공동체는 선교본당으로 우리 신자들이 오지만, 삼양주민연대는 비신자도 함께하는 그야말로 마을공동체에요. 올해가 꼭 창립 20주년이 되었어요. IMF 때 실직자, 노숙자 문제가 많이 생겼어요. 또 도시재개발을 한다고 철거도 한창이었어요. 그때 성공회 나눔의 집에서 실직자를 위한 사업단을 만들었고, 1999년 서울북부실업자사업단강북지부를 창립했는데, 그게 삼양주민연대의 출발이었지요. 경제적 자립과 주거복지, 소액대출 등 어려움에 부닥친 가난한 사람들을 위한 사업을 계속 해왔어요. 그러다 서울시와 함께 도시재생사업을 시행하면서 사단법인 삼양주민연대라는 이름으로 그 사업의 센터 역할을 했어요.” 안 신부가 도시빈민, 지역 운동을 하면서 소위 ‘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의아했다. 돌아오는 안 신부의 답은 간명했다. “사실 민주당 정권 때는 편했어요. 정말 그래요. 노무현 정권 시절에는 실무자가 8명이었어요. 그런데 MB 정권 때는 2명으로 줄었어요. 4대강개발에 정부 돈을 다 쏟아붓느라 지원받기 어려웠지요. 그런데 다시 문재인 정부가 되니까 지원도 늘어서 실무자가 이제는 6명이에요.


한국전쟁 때 순교한 동명의 골롬반 사제의 길을 따른 뉴질랜드 청년

안 신부의 프로필을 살피다 보면, 그의 삶이 얼마나 가난한 이들에게로 향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그와 관계된 사목활동을 내 나름의 키워드로 정리해 본다면, ‘가난한 이들의 자활, 자립, 연대, 통합’으로 모였다. 오늘의 안 신부를 알아보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그가 살아왔던 삶을 물었다.
“난 1941년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태어났어요. 남자 셋, 여자 둘, 3남 2녀의 장남이에요. 아버지는 천주교 신자가 아니셨고, 어머니는 성당에 다니셨어요. 두 분은 관면혼배를 하셨지요. 나는 유아세례를 받았는데, 그때 받은 세례명이 로베르토예요(그래서 그의 영문 이름이 로버트다). 그리고 본당에서 운영하는 교회학교에 다녔어요. 어머니께서 골롬반회에서 나오는 월간지를 구독하셨는데 중국, 한국, 버마 선교사들의 이야기가 있었고 그 내용을 꼼꼼히 읽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6·25사변 때 순교하신 골롬반 신부님 이야기를 읽었어요. 이름[성]이 나와 같았어요. 브래넌. 그때가 11살 때였는데 너무 놀랐어요. 나와 이름이 같은 분이 한국에서 순교하셨다니. 고등학교를 마치고 보따리를 싸서 골롬반회에 연락하고, 호주 시드니에 있는 신학교로 갔어요. 한국보다는 덜 하지만, 부모님께서는 장남에 대한 기대가 은근히 있었어요. 하지만 아버지께서는 신학교 가는 걸 허락하셨지요. 아버지는 평생 성당 다니시지는 않았지만, 내가 신부가 되는 것을 막지 않으셨어요.” 안 신부의 성소는 그렇게 한국과 관련이 깊었다. 어쩌면 그것이 안 신부가 평생 한국을 떠나지 않게 된 이유일지도 모르겠다.
안 신부는 자기 조상에 대해 연구를 했다면서 조상들의 이야기도 해주었다. 아버지는 뉴질랜드 출신이고, 아버지의 할아버지까지 모두 뉴질랜드에서 태어났다고 했다. 정확히 기억했다. 그 할아버지는 19세기 사람, 그러니까 1861년생이고 7남매의 막내였다고 한다. 그 할아버지의 부모님이 1840년 영국에서 이주해 왔다면서, 안 신부는 “나는 정통 뉴질랜드 사람이에요. 뉴질랜드 토박이”라고 했다. 안 신부의 어머니도 호주에서 태어났지만, 그 부모님은 100년 전 영국에서 이주했다고 했다. 그렇게 ‘정통 뉴질랜드 사람’으로 태어난 안 신부가 한국에 온 지 54년이 되었다. 1966년에 한국에 왔으니 뉴질랜드보다 한국에서 산 햇수가 더 많다. 안 신부는 19살에 뉴질랜드를 떠나 호주 신학교에서 7년을 공부하고 한국으로 왔다. 안 신부에게 고향, 또는 고향에 대한 그리움에 관해 물었다.
“어머니께서 3년 전에 돌아가셨어요. 96세로 선종하셨지요. 돌아가실 때는 요양원에 계셨는데, 90세까지 혼자 집에서 사셨지요. 어머니 집에는 내 방도 있었어요. 10년 전까지 내가 집에 갈 때면 직접 음식도 해주시고 그랬어요. 아들 신부에게 대접을 해주신 거죠. 이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집도 없어요. 뉴질랜드 가면 동생들도 잘해주고, 또 조카들 집도 방문하고 그러지만 오래 있질 못해요. 심심해요. 가족 외에는 이제 만날 친구도 학교 동창도 없어요. 한국에 온 지 오래되었어요. 너무 오래 떨어져 있었어요.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는 고향이랄까, 그리움이 있었지만, 이제는 별로 없어요.” 그렇겠다 싶었다. 그가 말하는 표정을 보면 안 신부의 인생에서 한국은 고향 그 이상의 의미가 있어 보였다. 이 담백한 신부는 어릴 때는 “조용하고, 내성적”이었다고 했다. “운동보다 책을 많이 읽었고, 생각도 많이 했고, 대화하기를 좋아했어요. 어릴 때는 체격도 왜소하고 힘도 없어서 럭비도 못 했어요. 아버지를 따라 축구를 좀 해봤는데 재미없었어요.” 안 신부는 그러한 독서와 사색의 시간 안에서 선교 사제의 꿈을 키웠던 것 같다.

 “최양업 신부님 옆자리가 내가 묻힐 자리”

안 신부는 죽어서 한국에 묻히기로 했다. 한국에 묫자리를 봐두었는데, 그곳이 베론성지다. 배론성지는 황사영 순교자가 백서를 썼던 곳이고, 한국에서 처음으로 사제양성을 위한 신학교육을 했던 곳이 아니던가. 게다가 1861년 선종한 한국 두 번째 사제 최양업 신부의 무덤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내가 죽으면 최양업 신부님 옆에 묻어달라고 했어요. 나는 김대건 신부님보다 최양업 신부님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해요. 김 신부님은 사제가 된 후 바로 순교했지만, 최 신부님은 아주 오랫동안 어려운 상황 속에서 선교 활동을 하셨어요.” 안 신부는 최양업 신부에게서 참 선교사의 모습을 보고 있었다. 김대건 신부가 피의 순교라는 적색 순교를 하였다면, 최양업 신부는 자기 비움과 희생으로 평생 선교와 사목에 매진하다 병사했다. 안 신부는 그 최양업 신부의 무덤이 있는 배론에 뼈를 묻고 싶다고 했다. 자리는 있는지 넌지시 물었다. “원주교구 성직자 묘지에 예약을 해두었어요. 내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원주교구에서 사목했어요. 김지석 주교님께서 구두로 허락하셨는데, 지금 교구장이신 조규만 주교님 생각은 어떠실지 모르겠어요.”
안 신부는 1966년 한국에 처음 와서 서울 정동에 있는 프란치스코 수도원의 명도원에서 2년 동안 한국말을 배웠다고 했다. 그는 상당한 수준의 한국말을 구사했다. 한국말 수업이 끝나자 바로 원주교구로 향했다. 춘천, 원주, 광주교구 중에 안 신부는 원주교구를 선택했다. 춘천에는 박 토마 주교, 광주에는 현 하롤드 대주교가 있었다. 두 주교 모두 골롬반회 소속이었다. 하지만 안 신부는 생긴 지 얼마 안 된 원주교구로 갔다. 원주교구는 1965년 창설되어 지학순 주교가 초대교구장으로 있었다. 안 신부에 따르면 당시 원주교구는 14개 본당이 있었는데 한국인 신부 7명, 골롬반회 신부 7명, 그렇게 14명의 사제가 있었다고 했다. 27세의 뉴질랜드 젊은 사제가 삼척 사직동 본당에 파견되었다. 삼척에서 1년을 보내고, 1969년 정선 본당으로 가서 1979년까지 이동 없이 10년 동안 사목을 했다. 교구장 지학순 주교와는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했다.


저항의 시대, 지학순 주교와 함께

“첫인상이 참 좋았어요. 주교님과 잘 지냈어요. 1968년 한국사회는 박정희 정권 시절이었어요. 지 주교님께 지금 한국사회에 문제가 많다. 왜 교회가 가만히 있느냐, 주교회의는 왜 말이 없는가, 물었어요. 주교님께서는 지금 교구도, 교회도 문제가 많다. 교회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땐 그랬어요. 그런데 박정희 독재가 심각해지는 거예요. 유신헌법 만들고, 긴급조치를 발표하면서부터 주교님이 움직이기 시작했어요. 전주 김재덕 주교님, 서울 김수환 추기경님, 지 주교님 이렇게 세분이 사회문제에 대해 강론하기 시작했어요. 정부는 시끄러운 사건을 만들어 지 주교님을 구속했어요. 주교님이 민청학련과 관련되어 있다는 거죠. 교구 사제들이 모두 나서서 주교님을 뒷받침했어요. 지 주교님이 구속되던 1974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생겼죠. 나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하고 참여했어요. 그런데 우리 본당에 다니던 신자 공무원, 그러니까 정선군청, 사무소 직원들이 자기들 입장이 대단히 곤란하다면서, ‘신부님은 가만히 있으면 좋겠다’라고 했어요. 사제단의 전국기도회는 참석하기 어려웠지만, 교구 원동성당 기도회는 거의 매주 갔어요.”
안 신부의 사제생활은 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년)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그가 신학교 생활하는 동안 공의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안 신부는 바티칸공의회의 충분한 세례를 받은 공의회 사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바티칸공의회가 끝나고 사제가 된 뒤 안 신부는 지 주교와 함께 박정희의 유신시대에 저항했다. 사제의 삶에 녹아든 큰 역사적 사건은 그의 일상과 무관하지 않았다. 안 신부는 지 주교에 관한 일화를 소개했다.
“지 주교님이 공의회 마지막 회기에 참석하셨어요. 그때 지 주교님 옆에 앉아있던 분이 내 고향의 딜러지(Delargy) 주교님이었어요. 두 분이 서로 알게 되었는데, 딜러지 주교님은 보좌주교 하시다 웰링톤 교구장도 되시고 추기경이 되셨어요. 그분께 나중에 재정적 도움을 받았어요. 정선성당 지을 때 만 불을 보내오셨어요. 그리고 딜러지 추기경님이 돌아가셨을 때, 지 주교님이 장례미사에 가셨어요. 지 주교님은 뉴질랜드 간 김에 우리 부모님을 방문하시기도 했어요.” 안 신부는 원주교구에서 10년 넘게 지 주교와 인연을 맺었다. 청년 시절을 원주교구에서 다 보낸 셈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보낸 사연이 있었다. “1974년에 본국 휴가를 가게 되었는데, 지 주교님이 구속 중이신 거예요. 그때는 2년마다 체류 허가를 받았어요. 그런데 시국기도회에 참석하니까 다달이 체류 허가를 받으라는 거예요. 한국을 떠나면 다시 못 올 수 있다고 해서 휴가를 가지 못했어요. 또 그때 성당도 짓고 해서, 안식년 휴가 없이 1979년까지 원주교구에 있었어요. 그해 10월에 박정희가 죽었지요. 놀랐어요. 한국사회는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렇게 암살될 줄 몰랐어요. 박정희가 죽고 다시 2년짜리 체류허가증이 나왔고, 안심하고 안식년 휴가를 갔어요. 뉴질랜드 고향에 가서 성탄을 보내고, 미국 버클리 예수회 신학대학에서 그리스도론과 선교학 석사과정을 공부했어요. 1980년 한국이 민주화의 봄일 때 휴가를 보내고 있었지요. 5·18광주 소식은 뉴질랜드 집에서 나중에 들었어요. 자세한 내용을 몰랐는데, 독일 기자가 만든 다큐멘터리를 봤어요. 잔인하고 슬픈 이야기죠.”


첫 안식년, 그리고 서울 목동 철거촌으로

10년 넘게 한국의 시골에서 살았고, 체류도 자유롭지 못했던 한국, 안식년 휴가도 어렵사리 얻어서 떠난 이 한국에 안 신부는 왜 다시 돌아왔을까. 다른 선교지를 선택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안 신부는 다시 망설임 없이 웃으면서 대답했다.
“그럼요, 한국만 생각했어요. 한국에 투자를 너무 많이 했어요. 오로지 한국만 생각했어요. 1981년 여름 그러니까 6월에 버클리 예수회 대학을 졸업하고 7월에 다시 한국에 왔어요. 한국에 다시 돌아간다면 원주교구로 가고 싶었는데, 버클리에 있을 때 지부장이 공부 마치고 돌아와 서울교구에서 활동하라고 추천했어요. 서울교구도 성당 없는 가난한 동네도 많다는 거예요. 그래서 1981년부터 목동에 가게 되었어요.” 안 신부는 한국에서 정말 열심히 선교활동을 했다. 정선에서는 신협도 만들고, 가톨릭농민회 활동도 했다. 그는 70년대 한국사회의 이농과 도시화 과정을 다 지켜보았다. 그는 마치 그러한 도시화 과정에 자신을 맡긴 듯, 원주교구를 떠나 서울교구로 갔다. 서울로 가긴 갔는데, 서울이라 할 수 없었다. 안양천과 경계를 이룬 목동이었다. 1981년의 목동은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오늘날의 목동이 아니었다. 이곳에서 안 신부는 이제 평생 몸을 바칠 선교 활동의 화두를 만났다.
“내가 목동에 갔을 때, 사실상 목동은 서울이 아니었어요. 안양천변에 있는 가난한 동네였어요. 이미 서울에서 쫓겨난 철거민들이 살고 있었어요. 박정희가 광주대단지(지금의 성남시) 보다 더 먼저 여기 목동에 철거민들을 쓰레기차에 실어 가서 버렸어요. 목동, 신정동, 등촌동 등 강서지역이 생기면서 서울시로 편입되었어요. 성당 주변에는 논이 많았어요. 안양천은 구로공단에서 내려오는 물로 다 썩어 있었어요. 수질 오염이 심각했지요. 납, 수은이 든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었어요. 그야말로 땅속까지 썩은 동네였어요. 이 지역에 개발이 시작되었어요. 전두환 정권은 88올림픽을 앞두고 김포공항에서 서울로 가는 길에 있는 지저분한 판자촌이 눈에 거슬린다며 없애버리려 한 거죠. 그런데 빈터에 신도시가 생긴다고 선전을 해대니 사람들은 신났지요. 신자들도 바보 같았어요. ‘이제 우리 멋진 데 살게 됐다’면서 좋아했지만 아무 보상도 받지 못하고 쫓겨났어요.” 목동 이야기를 하면서 안 신부는 평소의 지론을 펼쳤다. “개발은 지역 주민을 위한 것이어야 해요. 있는 사람들, 가진 사람들을 위한 재개발은 올바르지 않아요. 아직도 마찬가지죠.” 안 신부가 목동에 있을 때, ‘목동철거사건’이 터졌다. 안 신부는 주민들, 신자들 사이의 갈등도 다 지켜보았다. 그 사이에서 안 신부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목동 사거리 건너편에 자기 땅과 집을 가진 사람들은 잘됐다고 하는데, 그럼 무허가 판자촌에 있는 사람은 어떡하냐고 했지요. 난 쫓겨나는 사람 편이었어요. ‘있는 사람이 없는 사람을 이해해야지. 복음이 뭐냐? 몇몇 사람만 잘살면 뭐냐?’ 그랬죠.”
목동 철거민을 한데 묶어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안 신부는 이 일에 제정구 선생과 예수회 정일우(John V. Daly) 신부의 도움이 컸다고 했다. 이 시기에 빈민 지역에서 활동하던 평신도, 사제, 수도자들이 목동철거투쟁에 합류하고 이후 대책을 논의하면서 천주교도시빈민사목협의(약칭 ‘천도빈’)를 결성하였다(1985.3.25.). 안 신부는 이들의 도움으로 목동 재개발로 쫓겨난 사람들을 목화마을로 이주시키는 작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목화마을은 ‘목동에서 보금자리를 철거당한 주민들이 화합을 이루어 산다’라는 뜻으로, 복음자리, 작은자리에 이은 철거민 이주 공동체였다

골롬반 신학원장에서 삼양동 동네 신부로

안 신부는 목동철거문제를 마무리한 뒤 골롬반선교회 신학원장을 맡았다. 한국 골롬반회는 1985년부터 신학원을 만들고 처음으로 한국인 회원을 양성하기 시작했다. 현재 한국인 선교 사제가 16명 있는데, 그중 5명이 안 신부의 제자라고 했다. 안 신부는 ‘제자’라는 단어를 힘주어 말했다. 골롬반회 한국지부장을 맡기도 했던 김종근 도밍고 신부가 작년에 은경축을 지냈다고 한다. 안 신부는 1985년부터 1990년 말까지 6년 동안 신학원장 소임을 무사히 수행하고 두 번째 안식년을 보냈다. 이번에는 미국 시카고 CTU(Catholic Theological Union)로 가서 성서학 1년 과정을 이수했다. 전반부는 4개월 동안 이스라엘과 그리스 현지에서, 후반부는 시카고에서 공부했다.
이번에도 안식년을 끝내고 1992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교구청에서 김수환 추기경을 만났다. 안 신부는 목동철거문제를 접한 뒤 재개발지역과 도시 빈민, 그리고 빈민 사목에 관심이 깊었다. “김 추기경님은 삼양동에 이기우 신부님 혼자 있는데, 함께 활동하는 것 좋겠다고 했어요. 그래서 1992년부터 계속해서 삼양동에 살고 있어요. 그때는 삼양동이 미아6동이었죠. 삼양동 살면서 5번 철거당했어요. 집이 헐리면 이사를 하고, 5번 철거당하면서 2번 보상받았어요. 지금은 삼양사거리 다세대주택에 살고 있는데, 글쎄 철거당하지는 않겠지요.” 철거를 경험했던 안 신부는 마을 재생, 도시 재생에 관심이 많았다. 마을 재생은 재개발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안 신부의 설명이 이어졌다.
“박원순 서울시장이 추진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도시 재생 사업은 재개발 사업과 분명히 다릅니다. 재개발은 관이 개입하는 타율적인 사업인 데 반해, 재생 사업은 지역 주민들 스스로가 살기 좋은 지역을 만드는 보다 주체적이고 민주적인 사업 방식이에요. 만일 헐고 다시 짓는 재건축을 할 경우, 지역 주민 75%가 찬성해야 해요. 세입자도 동의해야 하고요. 법이 많이 바뀌었죠.” 법으로 정해졌으니 정권이 바뀌어도 그대로 유지될 수 있겠다고 했더니, 안 신부는 웃으면서 “권력자는 법을 바꿀 수가 있어요. 지금 야당이 정권을 잡으면 그렇게 법을 바꿀 수도 있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재개발보다는 재생 사업이 좋고, 기관이 아닌 주민이 주체가 되는 것이 좋아요. 같이 의논하고 동의한 만큼만 건물이 올라가는 거예요. 마을 전체를 허무는 일은 좋지 않지요.” 안 신부의 말을 들으면서, 이런 재생 사업을 하려면 동네 사람들을 단단히 묶어내는 주민연대 사업이 중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서는 이웃에 누가 사는지도 잘 모르는데 하나의 마을을 엮어내는 작업은 무척 힘들어 보이는 데, 삼양주민연대와 솔샘공동체가 어떤 모범적이고 상징적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닌지 물었다.


도시빈민 사목과 선교본당

“사실 사람들을 연대하게 만드는 게 제일 어려워요. 이웃을 만드는 데 시간이 많이 걸려요. 주민센터 같은 곳에서 저녁 7시에 주민 모임을 진행하면서 우리 지역 활동가 중에 누가 주민교육을 하면 처음에는 노인들 몇 명이 모여요. 그러다 많지는 않지만, 호기심이 있고, 관심을 가진 사람들 20~30명이 모여요. 마을, 동네 문제에 고민이 있는 사람들이 모이는 거죠. 처음에는 어려웠지만, 이제는 어는 정도 자리 잡았어요. 5~6년 걸렸어요. 삼양동은 서울시와 협조해서 일하는데 잘 되는 편이에요. 우리 쪽 사업이 모범적이라, 작년 여름에 박원순 서울시장이 한 달간 삼양동 옥탑방에서 살기도 했지요.” 삼양동은 서울교구 빈민사목위원회 신부들이 상주하는 곳이다. 안 신부는 삼양동 선교본당 초대 주임신부이기도 하다. 안 신부는 선교본당 설립 배경을 설명했다. 선교본당 설립은 1997년 IMF사태 이후 발생한 실업과 주거불안 등 또 다른 형태의 도시빈민에 대한 사목적 대응이기도 했다.
“1998년 6월 김수환 추기경님이 은퇴하시고, 정진석 주교님이 교구장이 되시면서 선교본당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어요. 아시다시피 빈민사목위원회는 천도빈을 모태로 해서 1987년에 만들어졌고요. 선교본당 설립은 이기우 신부님이 4대 위원장을 하던 때였지요. 같은 동네에 살던 이 신부님이 위원장이 되어 교구로 들어가시고, 나는 삼양동에 남아 미아1동(삼양동) 선교본당인 ‘솔샘공동체’를 만들었어요. 1998년 9월이에요. 그리고 이듬해 1999년 2월 금호1가동 ‘샛마루공동체’와 무악동 ‘독립문공동체’, 봉천3동 ‘하늘자리공동체’를 만들었어요. 이미 있던 빈민사목 공동체를 기반으로 서울의 동서남북 네 곳에 선교센터를 만든 셈이죠. 상당히 의도적이고, 의식적으로 선교본당을 설립했어요. 당시 서울 몇 군데 빈민사목 공동체가 있었어요. 난지도 쪽에 있던 예수회 박문수 신부님이 독립문 지역으로 가시고, 골롬반 신부들이 활동하던 신림10동 달동네, 마리아 전교자 프란치스코 수녀회 수녀님들이 계시던 금호동, 그리고 삼양동은 나하고 이기우 신부님이 있었지요. 빈민사목위원회가 30년이 넘었고, 선교본당도 이제 20년이 되었어요.”
세상이 변했다. 이제 달동네도 거의 없어졌고, 일반 본당이 있는 곳에 들어선 선교본당은 혹시 옥상옥은 아닌지 궁금했다. 선교본당 20년, 목동성당부터 시작하면 40년 가까이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한 안 신부다. 그에게 가난의 의미 그리고 가난한 사람은 누구인지, 또 선교본당의 의미를 물었다.

선교본당의 존재 이유

“과거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눈에 띄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지금은 쑥 들어가 있지만, 그냥 남아있어요. 교회가 그들에게 관심을 두고 있는지 모르겠어요. 선교본당은 무엇보다 가난한 사람들을 우선으로 생각합니다. 일반 본당은 보통 일반 신자들을 생각하고요. 처음에 선교본당이라는 이름을 지을 때, 빈민사목위원장 하던 이기우 신부님과 논쟁이 있었어요. ‘제발 본당이라 하지 말자. 본당이라 하면 본당답게 운영하게 된다. 사목회를 비롯해 본당 틀에 맞게 운영하게 된다. 공동체라는 이름이 있지 않은가. 하늘자리공동체, 솔샘공동체도 있는데….’ 그런데 이기우 신부님 고집도 있었지요. 이 신부님은 ‘선교본당도 자립해야 인근 본당이 개입하지 않는다. 그래서 본당이라는 이름을 써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지요. 아무튼 선교본당이라는 이름으로 결정됐어요. 선교본당이라 하지만, 본당처럼 운영하지 않기로 했어요.
선교본당은 신자들만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생각해요. 선교본당은 지역 주민을 위한 공동체죠. 사람들을, 신자들을 오라 하지 않고, 지역을 향해 우리가 나가는 의미에서 ‘선교’본당, 공동체입니다. 빈민사목하는 신부님들끼리 이 문제에 대해 여러 번 의견을 나누었어요. 한번은 유경촌 주교님께 말했어요. 선교본당 대신 지역선교센터라는 이름으로 운영하면 어떻겠냐고. 그런데 염수정 추기경님이 안 된다고 하셨어요. 장위동까지 5개 선교본당이 있는데, 갑자기 본당이 5개나 없어지면 로마에서 문제가 될 수 있다고 하셨데요.” 글쎄 서울교구 본당 하나 없어지는 걸, 로마에서 심각하게 생각할까. 의구심이 들었다. 교구장은 선교본당을 서울교구의 일반 본당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선교본당의 정체성 또는 빈민사목 담당 사제들의 치열한 고민에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안 신부는 이어서 빈민사목 현장에서 나름대로 준비한 대안을 말해주었다. “어떤 활동을 위해서 무슨 이름을 갖는 것이 중요하긴 한데, 아무튼 우리는 본당이라는 말을 써도, 운영은 지역 주민을 위한 센터로 생각하고 있어요. 신자들을 위한 본당도 있지만, 지역 주민을 위한 평화의 집도 따로 운영하고 있어요. 본당은 ‘와라’ 하면서 나의 울타리를 쌓지만, 선교본당은 울타리를 허물고 파견을 나갑니다. 신자들에게는 이를테면 성모의 밤, 성주간 등의 전례에는 일반 본당으로 가라고 합니다. 대신에 우리는 부활절 미사 때 세상으로, 현장으로 나갑니다. 현재 위원장인 나승구 신부님이 이 문제에 많은 신경을 쓰고 있어요.”

교회 재산은 가난한 이들을 위해 써야 한다

안 신부는 그가 말한 자신의 성격처럼 선교본당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는 빈민사목 신부들과 활동가들을 통틀어 ‘우리’라고 하면서 형제애를 드러냈다. 나도 가끔 빈민사목 현장에 있는 사제들을 만날 때마다, 그들 역시 진지하게 선교본당 자체에 대한 고민이 적지 않다는 것을 느꼈다. 사제로서 가난한 삶을 산다는 것,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안 신부와의 대화는 서서히 마무리되고 있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난한 이를 위한 교회가 아니라 가난한 교회’가 될 것을 주문했다. 안 신부가 생각하는 ‘가난한 교회’가 궁금했다.
“교회가 가진 재산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서 써야지요. 명동성당 입구를 장식한 화단, 그 옆의 교구청 별로 좋지 않아요. 가톨릭센터가 멀쩡하게 있는 데 왜 건물을 또 올립니까. 우리에게는 멋진 교구청이 필요한 게 아니에요. 교회 재산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겠지만, 정말 가난한 이들을 위해 써야 해요. 교황님도 신자들에게 필요 이상의 것을 거두지 말고, 가난한 교회가 될 것을 말씀하시죠.” 안 신부가 말하는 가난한 교회에 대한 생각을 들으면서, 사도 바오로가 사도공의회를 마치고 예루살렘을 떠나면서, ‘가난한 이를 기억하겠다’며 선교활동 중에 헌금을 모았던 것이 생각났다. 바오로에게 있어 가난한 이를 기억하는 헌금은 교회의 일치와 연대의 상징이었다. 가난한 교회, 어쩌면 그것이 그리스도교의 태생적 본질이 아니었던가. 안 신부가 선교사로서 지니는 파견의식과 가난이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어떠신가, 묻자 안 신부는 “답답해요. 우리 교회”라는 답이 돌아왔다. “남의 차를 빌려 타 본 적은 있지만, 나는 평생 내 차를 가져 본 적이 없어요. 강원도 있을 때 운전을 좀 했지만, 서울에 와서는 운전하지 않았어요. 지금은 운전면허증도 없고요.” 안 신부는 서울로 와서 처음에 사목했던 목동을 빼고 줄곧 강북에만 살았다. “옛날 한국은 서울과 그 나머지라고 했지만, 지금은 강남과 그 나머지라고 하지요. 나는 강남 갈 일도 없고, 그쪽에 아는 사람도 없어요. 언젠가 강남의 어느 결혼식장엘 한 번 갔는데, 완전히 딴 세상 같았어요.” 왠지 그가 말하는 서울 집중현상 그리고 강남과 강북으로 갈라진 이 사회의 자화상이 씁쓸했다. 안 신부는 뉴질랜드, 호주, 한국의 원주교구, 서울교구, 그중에서도 이 삼양동에서 가장 오래 살았고, 이제는 삼양동이 제일 익숙하다고 했다. 우리 시대의 가난, 가난한 사람에 대한 그의 이해가 어쩌면 그를 이 삼양동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삶에 투신하도록 만든 바탕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난한 사람, 남의 도움과 사랑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

“가난한 사람은 경제적으로 살기 어려운 사람입니다. 돈이 없어서 먹고 입고 자는 것이 어려운 사람입니다. 또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나오는 것처럼, 남의 도움, 남의 사랑을 필요로 하지만, 그 도움과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이 도움과 사랑은 경제적인 부분과 정신적인 부분 모두 포함됩니다.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지 못할 때, 도움을 받지 못하는 사람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아프고 병들고 나약해졌을 때 도움을 받지 못하고, 공부하고 싶지만 돈이 없어 포기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말하는 가난은 무척 구체적으로 들렸고, 이내 “너희는 내가 굶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내가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였을 때에 따뜻이 맞아들였다. 또 내가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내가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으며, 내가 감옥에 있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태 25,36-37)라는 예수의 말씀을 떠올리게 되었다. 예수의 최후심판은 안 신부가 말하듯, 도움과 사랑이 필요한 사람에게 다가가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으로 갈라진다. 그리스도교가 자비와 환대의 종교가 되어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안 신부의 유창한 한국어로 인해 ‘만남’은 쉽게 진행되었다. 이제 만남을 마무리하면서 그가 한국의 원로 사제로서 한국의 교회와 후배 사제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를 물었다. 안 신부는 마치 오래전부터 생각해 온 듯 바로 답을 주었다.

한국의 사제들, 성직주의와 권위의식을 버려야 한다

“한국 신부님들 문제점은 성직주의와 권위의식이에요. 제발 그 두 가지는 피했으면 좋겠어요. 성직주의는 특권이에요. 특권주의 자체가 좋은 게 아니에요. 우리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인데, 누가 높고 낮음이 있고, 누가 더 특별할 수 있나요. 권위주의도 마찬가지죠. 윗자리에 앉아서 아랫사람 부리고 지시하는 것, 특히 일반 본당에 가면 너무 많이 보여요. 그리고 지방 신부들과 도시 신부들이 달라요. 시골 신부들은 욕심도 없고, 권위도 없고 겸손하게 신자들을 함께 하는 것 같아요. 대도시의 큰 본당 신부들과는 너무도 다르죠. 어디까지나 신학교 문제인 거 같아요. 잘못 가르치는 것 같아요. 우리 빈민사목 신부님들은 차를 갖지 않고, 사무원, 식복사도 없이 스스로 모든 일을 처리하고 또 되도록 지금 사는 지역 수준에 맞는 삶을 살자고 결정했어요.”
안 신부가 지적한 특권주의, 권위의식은 가난의 문제, 가난한 교회와도 연결되었다. 사제가 가난의 성소, 자기 비움의 거룩함을 잃어버렸을 때, 특권과 권위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현재 서울교구 빈민사목 담당 사제들 7명 중 안 신부가 최고 연장자이다. 현재 삼양동 선교본당 주임신부는 강현우 신부다. 안 신부는 자신이 보좌신부라 했다. 안 신부는 삼양동 선교본당 초대 주임신부를 하고서는 줄곧 보좌신부로 있었다면서 미소지었다. 강 신부는 7명의 사제 중의 가장 막내다. 빈민사목의 최고 연장자와 막내의 콜라보가 멋져 보였다. “지금 이렇게 둘이 있는 게 너무 좋아요”라고 말하는 안 신부는 대화를 마치자 사제관으로 안내하였다. 그곳 휴게실에서 지학순 주교가 석방되던 날 원주교구 신부들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었다. 젊은 시절 안광훈 신부를 두고 사람들은 영화배우 로버트 레드포드 닮았다고 했다고 한다. 지 주교 뒤에 선 그의 모습은 멋지고 의젓한 청년이었다. 여든이 다 된 지금의 나이에도 안 신부는 여전히 그 청년으로 남아있었다. ‘만남’을 마치고 돈암동 골롬반회 대문을 나서도 아직 어둠은 내리지 않았다. 그의 미소가 남아있는 따듯한 저녁이었다.

가난한 사람이 되어버린 사제 – 안광훈 신부와의 ‘만남’

대담 및 정리: 오민환 <기쁨과희망> 편집장

출처: 기쁨과희망사목연구원 발행 <기쁨과희망> 제23호(2019년 여름호) 120쪽~137쪽

2019-07-16T17:45:32+09:002019/07/15|골롬반 소식, 보도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