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교구주보] 공 토마스 신부_춘천교회사연구소

<기록으로 보는 춘천교구 80년>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Ⅵ- 기억에 남는 선교사 2

공 토마스 신부(Fr. Thomas Comerford, S.S.C. 1919. 10. 31 – 2009. 2. 19)
– 주님의 길을 따라 오롯하게 살아간 선교 사제의 표양 –

글/ 교회사연구소

공 토마스 신부는 1919년 10월 31일 아일랜드 킬케니에서 태어나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1943년 12월 21일 사제품을 받았다. 그러나 그가 사제가 될 당시는 제2차 세계 대전 중이어서 즉시 선교지로 갈 수 없었기에 잠시 다른 곳에서 사목 생활을 하였다. 그러다가 전쟁이 끝난 후 1947년에 한국에 입국하여 그 이듬해 2월에 홍천 본당 보좌신부로 부임하면서 본격적인 선교 여정을 시작했다. 공 신부는 54년간 홍천, 원동, 죽림동, 학성동, 단구동, 양구, 양덕원, 가평, 교구청, 원통에서 사목했고 2002년 1월 15일 일동 본당 이동공소에서 은퇴하였다. 그는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소속으로 춘천교구에서 활동한 마지막 선교 사제였다.

공 신부는 한평생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는, 문자 그대로의 ‘선교 사제’ 였다. 그는 언제나 복음을 전하고 교우들을 돌보는 일에 자신을 헌신했다. 한 명의 냉담자나 예비자를 방문하기 위해 온종일 시내버스를 타거나 몇 시간씩 걷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뛰어난 기억력으로 수십 년 전에 만났던 사람들을 잊지 않았고, 어린 아이에게라도 절대 반말하는 법이 없었다. 이른 나이에 중풍으로 고개가 돌아가고 머리를 흔들면서도, 사제관에 변변한 이불 한 채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긴 신자들이 새 이불을 해 드리자 다음 날로 그 이불을 가난한 사람에게 내어 주는 등, 특별히 가난하고 힘든 사람들에게 몸소 사랑을 실천했다. 공 신부는 50·60년대에 세 번이나 죽림동 본당 주임신부를 역임하였는데, 재임 기간 동안 전쟁으로 폐허가 된 죽림동 본당을 재건하면서 어렵고 궁핍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에 전력했다.

공 신부는 본인에게 늘 엄격하고 철저했다. 그의 손에는 언제나 기도서가 들려 있었고, 어눌한 한국말이지만 강론에 정성을 다했다. 가방 하나와 옷가지 몇 개 이외에는 가진 것이 없는, 진정으로 가난한 삶을 살았다. 그래서 생전에 박 토마스 주교는 사제 생활에 대해서 언급할 때면 언제나 공 신부를 그 표양으로 들면서, 후배 사제들이 그를 본받고 배울 것을 강조하곤 했다. 한 마디로 공 신부는 선교 열정과 가난한 삶, 그리고 겸손한 언행과 온유함을 간직한, 예수님을 닮은 ‘참 사제’ 였다.

공 신부는 자신이 일생을 헌신한 한국과 춘천교구를 진정으로 사랑했다. 그래서 현역에서 은퇴하면 돌아가야 하는 규정에 따라 본국으로 귀국한 후에도 늘 한국을 그리워했고, 죽어서라도 한국에 묻히기를 원했다. 그 간절함으로 결국 다시 한국에 돌아올 수 있었고, 요양원에서 생활하다가 2009년 2월 19일 선종하여 자신이 혼신을 다해 돌보고 사목했던 죽림동성당의 성직자 묘지에 묻혔다. 그가 선종한 날은 공교롭게도 김수환 추기경의 장례 일정과 겹쳤기에 빈소와 장례미사 때에 추기경 장례를 위해 준비했던 꽃을 그대로 사용했다. 일생을 겸손하고 청빈한 선교 사제로 살았던 공 토마스 신부는 마지막 가는 길마저도 그렇게 소박하고 검소했다.

출처: 천주교춘천교구 주보 2019년 9월 1일 발행(제2014호)

2019-09-17T09:59:02+09:002019/09/02|보도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