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차 해외선교사교육을 돌아보며

인보성체수도회 김보현 로사 수녀(후기)

 

“은총이 가득하신 마리아님 기뻐하소서. 주님께서 함께 계시니 여인중에 복되시며…”라고 찾아왔던 가브리엘 천사의 목소리처럼 ‘해외선교’라는 소명은 “예”라는 순명에 앞서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라는 의문을 토해내게 한다. 각자가 처한 상황에 따라 그 의문의 뿌리는 다르겠지만, 나에게 있어서 그 의문은 “아직 준비되어있지 않음”에서 오는 의심에서 시작된 것 같다.

만나는 이가 누가되었든지 진심으로 존경할 수 있는지, 그들의 문화를 존중할 수 있는지, 그리고 나 자신과 직면할 때 그 약함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내공이 준비되어있는지에 대한 의심이다. 조금 더 상상 속에서 마리아와 비교하자면, 천사의 황당한 메시지에 두려워하고 있던 마리아에게 가브리엘 천사는 “성령께서 당신에게 내려오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힘이 당신을 덮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의심 앞에서 우물쭈물 대고 있는 나에게도 “성령께서 이 모든 일을 하는 것이지 너의 능력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메시지를 정확히 쐐기 박아 말해주는 천사가 있었고, 그것이 4주간의 선교사교육과 그 시간동안 만났던 동기 18명이 아니었을까, 돌이켜 본다.

모세가 떨기나무가 불 속에서 타지 않는 것을 보고 놀라워하며 하느님을 체험하였던 것처럼, 그리 놀랄 것 없을 각자의 여정이 ‘부르심’이라는 불 속에 놓여 있다는 신비감을 체험한 것은 첫 날 ‘해외선교’라는 소명에 각자 출발점도 달랐던 그 나눔의 순간에서 부터였던 것 같다. 그리고 그 때부터 열려진 ‘신비감’은 우리를 가르치고, 배우게하며 때로는 피곤함에 졸게도 하였던 매일 매일의 일정에서 만났던 모든 선생님들과 선배 선교사들의 나눔들 그리고 그것을 담게한 순간 순간을 ‘낱개의 조각들’에서 하나의 그림을 맞추는 ‘퍼즐놀이’로 전환하게 해 주었다.

선교사가 가난한 이들을 위한 일방적인 선행이라는 생각의 틀에서 벗어나, 선교사의 나약함을 통해 현지인들의 도움도 받을 수 있는 ‘상호성’이라는 패러다임은 이제 하느님 나라에서 진정 힘있는 이웃은 더 이상 레위인과, 바리사이인이 아닌 착한 사마리아인이라는 복음 말씀을 부연설명 해주는 ‘각주’가 되어주었다. 도움을 주는 사람이 따로 있고 도움을 받는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는 어디에서든 서로에게 의지하고 상호 연관되어 있음을 인식하며 존중하는 마음을 배워야 함을 깨닫는다.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감각은 은총으로 깨닫지만 그것을 훈련을 통해 길러내야 하는 것은 선교사의 몫인 것 같다. 이는 인간과 인간의 관계에서 뿐 아니라 인간과 자연환경 그리고 그것들을 둘러싼 문화, 사회 안에서도 이루어지는 역동적 작용이다. 또한 다양한 종교와 문화 속에서 삶을 해석해 내는 각각의 이해도는 이제 더 이상 경제력을 기준으로 그 가치를 우선시 하는 것이 아닌 각각의 다양성 안에서의 풍요로움으로 각자의 해석을 바라 봐야 함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 같다. 그렇게 된다면 각 민족의 전통신앙과도 대화하며 배울 점을 찾아내는 민감함도 갖을 수 있지 않을까.

시골뜨기 평범한 소녀에게 다가온 엄청난 소명에 “말씀하신대로 제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하였던 마리아처럼 성령께서 하시도록 내어 맡길 수 있기 위해, 평범하기 그지없는 내 자신 속에서 타지 않는 떨기나무를 발견하는 신비감을 갖게 한 그 처음의 순간부터 ‘아직’은 아니지만 ‘이미’ 이루어지고 있는 선교사를 꿈꿔본다.

이렇게 천사는 메시지를 남기고 떠났고 마리아는 순명으로 그 일을 받아들이며 이제 시작하듯, 나도 이제 홀로 남아 그 일을 만나는 이들과 함께 시작하리라. 그리고 힘들고 지칠 때 다시 선교사교육를 기억하며 나의 떨기나무를 바라보리라.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