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광주 사람입니다_신 코닐리오 신부

이 글은 성골롬반외방선교회 故 신 코닐리오 신부가 남긴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증언입니다.
5.18기념재단이 발간한 <저항과 명상-윤공희 대주교와 사제들의 오월항쟁 체험담>에 수록된 글에서 일부 발췌하여 전해드립니다.
“나는 광주 사람입니다.” 신 코닐리오 신부의 이 말처럼 그는 선교사로서, 광주 사람으로 살면서 고통받던 광주 사람들과 함께했습니다.

광주 사람, 신 코닐리오 신부

광주항쟁이 계속되는 동안 나는 하루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일도 할 수 없었고, 앉아서 음악을 듣거나 책을 볼 수도 없었다. 전쟁 상태인데, 군인들이 무고한 시민들을 마구 죽이는데, 그리고 광주를 지키기 위하여 시민들이 나서서 싸우는데, 가만히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다. 얼마나 고통을 당하는지, 또한 광주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상황이 어떻게 변화되어가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은 충동은 나를 거리로 이끌어내었다. 나는 돌아다니며 ‘사제로서 무슨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명제를 가지고 계속 생각해 보았지만, 아무 일도 할 수 없었다. ‘내 능력이 이것밖에 되지 않는가’ 라고 생각될 때 나도 내 자신이 스스로 불쌍했다. 하느님은 특별히 내게 어떠한 임무를 따로 부여해 주시지는 않았다. 너무너무도 어마어마한 문제였기 때문에 다만 나는 함께 기도하고 말을 나누어 주는 것밖에 없었다. 그저 울고 있는 사람들의 손을 잡고 같이 고통을 느끼며 울었다. 벽안의 신부인 나였지만, 그분은 나의 손을 꼭 쥐었고, 나도 그분들의 손을 꼭 잡아 주었다. 

(…)

27일 이후로 신부님들이 많이 잡혀 가셨다. 언젠가 이영수 신부님과 기도하면서 “광주의거는 끝났지만 아직 ‘광주’는 끝나지 않았다”고 말을 나눈 적이 있다. 

국립 5.18 민주묘지

5월이 지나고 두 달 후에 휴가를 갈 준비를 했는데, 출국 전 주일이었다. 당시 농성동성당 공소였던 쌍촌동에 가서 미사를 드리고 나오는데 할머니 한 분이 건장한 젊은이 한 명을 데리고 와서 “신부님 덕분에 나왔습니다. 고맙습니다”하고 인사를 했다. 그 젊은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이 없었다. 내가 “고문을 당했느냐”고 물었더니 그는 고개를 돌리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무언의 대답이었다. 아무 관계도 없던 사람이 잡혀가서 고문을 당했는데 관계자들은 또 얼마나 큰 고통을 당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젊은이의 손목에는 철사로 묶였던 자국이 역력하게 내 눈에 비쳤다. 휴가를 마치고 돌아와서 나는 그 젊은이를 만나려고 했지만 만날 수 없었다. 손목에 철사로 꽉 묶였던 자국이 역력했던 그 젊은이가 대답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렸을 때, 그는 내게 무언의 대답을 준 것이었으며, 또 다른 고문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게 아직도 큰 기억으로 남아있다. 

이상한 소리, 돼지처럼 취급되었던 차 위의 사람들, 여기저기 흐뜨러진 신발들, 사람으로 탑쌓기, 공수부대와 헬리콥터, 상무관, 그리고 그 젊은이의 손목의 흉터, 이런 것들이 내 머릿속에 꼭꼭 기억되어 있다. 

아직 광주 문제는 끝나지 않았다. 

2018년 골롬반세계청년대회 참가자들이 광주 국립 5.18 민주묘지를 방문하여 희생자들을 추모하였다.

신 코닐리오(Cornelius Cleary, 1934~2008) 신부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아일랜드 출생으로 1957년에 사제품을 받고 이듬해 한국으로 파견되었다.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광주대교구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며, 당시 ‘외국인은 광주를 떠나라’는 지시를 따르지 않고, 골롬반 사제들은 광주에 남기로 결정할 때 큰 역할을 하였다. 그는 광주에서 경험하고 목격한 내용을 글로, 증언으로 남겼다.

2020-05-18T15:51:49+09:002020/05/18|골롬반 소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