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온유의 선물_권태문 사도 요한 신부

새로운 파견

저는 7명의 골롬반회 신학생들과 아일랜드 신부와 함께 마닐라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미얀마, 피지, 한국 등에서 온 신학생들은 1년의 수련 기간에 본 회의 영성을 공부하고 기도에 더 집중하면서 선교사로서 자신을 식별합니다. 간단히 말씀드려, 학문적인 공부가 아닌 마음공부를 하는 기간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사목을 맡기까지 적지 않은 부담감이 있었지만, 동료들의 격려와 기도로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신학생들의 수련 사목을 위하여 마닐라에 오기 전에 저는 호주 시드니에서 신학생 양성 과정을 공부하면서 크게 깨닫게 된 부분이 있습니다. 그 양성 과정은 주로 내면성찰이었습니다. 매주 영성지도가 있었고, 심리학의 도움을 받아, 사제 권태문으로서가 아닌 인간 권태문으로서 저를 깊이 들여다보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사제 권태문으로서 저 자신을 돌아볼 때는 좋은 사제의 자질을 먼저 묵상하고 그 부분을 어떻게 발전시킬지 고민하고 반성하게 됩니다. 하지만, 인간 권태문을 묵상할 때는 제가 이미 가지고 있던 여러 모습들, 좋은 점, 부족한 점, 약한 점, 부끄러운 부분들을 함께 보게 되면서 이런 모습들이 어떤 나를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즉, 자랑하고 싶은 장점들만 제 모습으로 인정하여 부분적인 나를 만들기보다는 총체적인 모습으로 나를 확장해 나가는 작업이었습니다. 단점마저도 인정하고 그것을 저의 모습으로 확장하는 일은 매우 힘든 과정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상(像)

이 양성 과정이 끝날 무렵에 했던 8일 피정에서는 제가 가진 하느님의 상(像)에 관해 묵상하게 되었습니다. 저의 하느님은 온유하신 하느님입니다. 온유하신 하느님! 그 온유하신 하느님을 떠올릴 때 느꼈던 감정은 바로 가슴 벅참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온유는 바로 완전한 사랑의 모습, 완전한 신뢰, 완전한 자기 비움의 모습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온유하신 하느님을 깊이 묵상할 때, 그분 안에서 특히 부끄러운 부분과 죄를 고백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온유 앞에서 헛된 자존심과 고집은 설 자리가 없어지며, 결정적으로 온유는 상대방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받아주고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온유는 우리가 스스로 참회하고 성찰하도록 어떤 억압이나 강요 없이 끊임없이 기다려주고 또 기다려줍니다.

더 나아가 이 기다림의 온유는 개별성을 가진 우리 각자의 모습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한 사람 한 사람 안에 있는 하느님의 선물을 온전히 드러내도록 도와줍니다. 기다림의 온유는 우리가 획일적인 모습으로 살아가길 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온유의 하느님은 자기 비움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양성의 충만함 안에서 우리가 각자 받은 다양한 선물을 나누며 살아갈 때, 더 크고 충만하신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온유는 바로 삶의 충만함을 만들어 냅니다.

온유는 약함이 아니라, 진정한 강함

강력한 권력이나 힘의 이미지는 비록, 그 모습이 인간적인 측면에서 매력적으로 보일지 몰라도 이 안에서 각자의 개별성은 무시되거나 혹은 무시할 수 있으며, 최종적으로 각 개인의 자유를 침범하고 그 각자의 주체성을 쉽게 잃어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온유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끊임없는 비난과 투정, 그분과 우리 자신 모두를 속이려 해도, 그것을 단죄하고 벌주시기보단 끊임없이 들어 주시고, 기다려 주십니다. 온유하신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언젠가는 자신의 모습을 깊이 깨닫고, 다시 당신께로 돌아오리라는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신뢰해서가 아니라, 그분께서 우리를 신뢰하시기 때문에 죄 중에 있더라도 그분께 언제라도 다시 돌아갈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이렇게 온유는 완전한 사랑, 완전한 신뢰, 완전한 자기 비움이신 하느님을 가장 잘 그리고 있습니다. 따라서 온유는 약함이 아니라, 진정한 강함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피정 중 하느님께서는 제가 그 온유의 모습으로 살길 바라심을 깊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분께서 온유의 선물을 제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깨달음을 통해, 저는 하느님께서 저는 마닐라로 부르셨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학생들과 함께 생활하며 지도한다는 것은 바로 온유의 하느님을 드러내는 삶임을 깨닫게 됨과 동시, 그 깨달음을 제 마음 안에 소유하게 된 것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을 소유한다는 것

사실 예전에는 온유의 이미지를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온유의 이미지는 사람들이 흔히 스스로 자랑하거나 매력적으로 느끼는 강한 리더십이나 카리스마적인 모습들을 발견할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한 예로, 선교지에서 제가 온유하게 다가갔을 때 무시당했다고 느꼈던 적이 간혹 있었습니다. ‘내가 강력한 리더십을 가지고 있었다면 나를 저렇게 대했을까’ 하며 분노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제가 가진 온유의 이미지를 그 사람들이 제게 했던 것처럼 무시했고, 동시에 강력한 리더십의 모습을 가진 이들을 부러워했습니다. 제가 가진 온유의 이미지를 버리고 싶었고, 제가 가지고 있지 않은 강력한 카리스마의 모습을 부러워하며 살았던 것입니다. 결국 그때 제게 남은 건 원망과 불평이었습니다.

시드니에서 양성 공부를 하는 동안 온유하신 하느님을 깊이 묵상하고, 그 안에 담긴 엄청난 보물을 발견하면서, 과거 무시하고 버리고 싶었던 그 온유의 모습으로 다시 살기로 굳게 다짐하게 되었고, 바로 그 안에서 참 자유와 평화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만약 온유의 이미지로 다가갈 때 사람들이 저를 무시하고, 이용하려 한다면 그것은 제가 받은 온유함 때문이 아닌 그 사람들의 부족함 때문이라고 확실히 선을 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이 온유의 선물을 완전히 소유하게(owning) 된 것입니다. 물론 하느님께 선물을 제 삶의 자리에서 쓰고 안 쓰고는 철저히 제 선택 의지에 달려있습니다.

제가 그분께 선물로 받은 온유의 모습으로 새로운 환경인 마닐라에서 감사하고 기쁘게 살아가며, 그 선물을 더욱 발전시켜 나가도록, 기도 중에 기억해 주시길 바랍니다.

권태문 사도 요한 신부
성골롬반외방선교회. 2013년까지 대만에서 선교하였고, 미국 포담대학교에서 영성신학을 전공한 후 아시아 지역에서 영성 강의와 피정 지도 등을 했다. 현재 필리핀에서 ‘영성의 해’(수련 과정)를 보내는 신학생들을 지도하고 있다.

선교일기

2020-07-15T13:17:10+09:002020/07/15|골롬반 소식, 선교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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