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평화신문] 귀향 앞둔 전요한 신부

“한국 부부·청년들이 저를 통해 하느님 얼굴 볼 수 있었기를…”

51년 선교사 생활 마치고 귀향 앞둔 전요한 신부(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출처: 가톨릭평화신문 2020.08.30 발행 [1578호]

▲ “한국에서 선교하는 동안 만난 부부들, 대학생들, 신자들이 저를 통해 하느님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봤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는 말을 남기는 전요한 신부.

‘ME’(Marriage Encounter, 매리지 엔카운터)운동과 ‘선택’ 프로그램하면 떠오르는 선교사 전요한(Sean Conneely, 76) 신부.

1969년 9월 아일랜드에서 한국에 파견돼 51년 세월을 올곧게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선교사로 산 그가 9월 6일 정든 선교지를 떠난다. 귀향을 앞둔 전 신부를 만나
‘두려움과 고통, 기쁨과 희망의 변주곡’과도 같았던 그간 선교 여정에 대해 들었다.

오세택 기자 sebastiano@cpbc.co.kr

“지난 51년 세월이 하루처럼 짧았습니다.”

전요한 신부는 눈물이 많았다. 인터뷰 중에도 자주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난 2월부터 아일랜드로 돌아가기 위해 항공편을 예약했다가 코로나19 때문에 취소하길 수차례나 거듭했다는 전 신부는 “머리보다는 감성으로 사는 사람이라서
떠나려 하니, 고맙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는다”고 말문을 뗐다.

아무래도 전 신부가 선교하는 동안 가장 관심을 뒀던 건 부부 일치 운동인 ME였기에 그 얘기부터 들었다. 그러자 전 신부는 “ME운동이 한국에 도입된 건
1976년 2월로, 메리놀외방선교회 마진학(Donald Maclnnis) 신부님이 미국인 부부 3쌍과 영어 주말을 하면서 비롯됐다”며 “저는 그해 9월 영어 주말,
11월 디퍼(Deeper) 주말에 함께하며 시작했는데, 초창기 초대 한국ME 대표팀 고 김진헌(클레멘스)ㆍ송호전(데레사) 부부, 12대와 13대 한국ME 대표팀
고 이금종(안토니오)ㆍ고 황정원(보나) 부부 등의 희생과 봉사, 수고가 먼저 기억이 난다”고 회고했다. 이 부부들과 함께 전 신부는 1977년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한국어 주말을 했고, 또 해외교포들과도 ME 프로그램을 나눴다.

그 와중에 전 신부는 1982년 국내 최초로 ‘선택 프로그램’(Choice Program)을 도입했다. 김포공항에서 우연히 만난 ME 부부의 권유로 그해 9월 선택 프로그램
자료를 구해 번역했고, 이를 연구해 그 개념을 이해한 뒤 1983년 6월 성령 강림 대축일에 첫 선택 주말을 시작했다.

“ME가 ‘부부 일치’ 프로그램이라면, ‘선택’은 미혼 젊은이들을 위한 자기 성찰 프로그램입니다. 12단계로 이뤄진 선택은 대화, 곧 커뮤니케이션입니다. 대화하면,
서로를 받아들일 수 있잖아요. 군부 독재 시기에 기성세대와 갈등하며 좌절하던 젊은이들에게 선택은 하느님의 부르심이 뭔지 성찰하게 해준 프로그램이었습니다.”

당시 전 신부는 1970년 8월부터 3년간 광주대교구 함평ㆍ흑산도본당에서 사목을 하다가 1974년 4월 서울에 올라와 대학생 사목을 하던 터여서 선택 프로그램은
이들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전 신부는 당시 선택 프로그램을 보급하면서 동시에 대학생 사목에 힘을 쏟았다. 1975년 9월 골롬반회 자체 예산과 독일 원조기구 미제레올의 도움으로 서울
성동구 도선동에 골롬반 가톨릭학생회관이 건립되자 이곳을 터전으로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 성동지구 소속 대학생들과 함께했고, 회관에 성신야학을
열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는 학생들을 돌봤다.

▲ 1969년 사제서품식 직후 전요한 신부(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가 가족들과 함께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 서울대교구 가톨릭대학생연합회 성동지구에서 대학생 사목을 할 당시에 학생들에게 성체를 영해주는 전요한 신부.
▲ “한국에서 선교하는 동안 만난 부부들, 대학생들, 신자들이 저를 통해 하느님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봤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는 말을 남기는 전요한 신부.

하지만 대학생 사목은 쉽지 않았다. 당시는 유신독재 시절이라 정보과 형사들이 수시로 회관에 들어와 “공산주의를 가르치는 건 아니냐?”고 캐묻곤 해 당혹스러웠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1970년대도 힘들었지만, 더 힘겨웠던 건 1980년대였다. 학생들을 보호하느라 형사들, 전경들과 밀치고 싸우며 갖은 고초를 다 겪었다.

“1984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 방한하셨을 때가 기억나요. 그때 장충체육관에서 젊은이와의 만남이 있었는데, 참석자의 3분의 1이 형사들이었어요.
나중에 학생들을 잡아갈까 봐 사진도 찍지 못하게 막고, 참석한 학생들이 집으로 도망칠 수 있게 도와주고, 형사들을 피해 도망치다가 다친 학생들은 성모병원까지
업어다 줬던 기억이 납니다. 한참 지나서 화염병이 촛불 예식으로 바뀌고 나서야 한 시름 놓았습니다.”

선교를 그만둘 뻔했던 위기도 겪어야 했다. 대학생 사목을 하다가 뜻하지 않게 알코올 중독에 빠지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국 시카고로 떠났다. 골롬반회 미국지부에서 그는 선교 홍보 소임을 맡고 중독 상담 전문가 과정에도 들어가 1994년에 자격증을 땄다.
1996년부터는 A.A(Alcoholic Anonymous) 단주 모임도 이끌었다. 동시에 시카고 로욜라대학 대학원에 들어가 사목 상담을 전공하고 1999년에
석사 학위를 받기도 했다.
영성 지도자 연수도 이때 받았다. 이 때문에 애초 6개월 예정으로 시작했던 미국 선교 기간이 13년이나 이어졌다.

알코올 중독은 시련이었지만, 그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줬다. 혼인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이혼 위기 부부들을 위한 ‘르투르바이 주말’을 미국에서 접하게 된 것이다.

“한국 가면 다시 술을 마시게 될 테니 미국 지부에 더 남아 있으라는 권유에 미국에 남았어요. 그러다가 르투르바이 주말에 들어가게 됐어요. 그게 1993년인데,
그 뒤로 10년간 미국 부부들을 위해 봉사했어요. 그 뒤 2005년 한국에 돌아와 르투르바이 주말을 소개했고, 2007년 12월에 첫 르투르바이 주말을 했습니다. ”

전 신부는 1943년 아일랜드 골웨이 태생으로, 1962년 9월에 입회했다. 골롬반 대신학교를 나와 1969년 4월 사제품을 받았고, 수품 5개월 만에 한국에 파견됐다.
작은형제회에서 운영하는 서울 정동 명도원에서 한국어를 익혔고, 51년을 본당 신부로, 대학생 지도 신부로, ME와 선택 팀 사제로 열심히 살았다.

끝으로 한국을 떠나는 심경을 묻자 전 신부는 “한국에서 선교하는 동안 만난 부부들, 대학생들, 신자들 통해 정말 많이 배웠다”면서 “저를 통해 그분들이 하느님 얼굴을
조금이라도 봤다면 더 바랄 게 없겠다”는 인사말을 남겼다. 또한, “아일랜드로 돌아가면 고향 근처 톨러흐성당에서 살 계획”이라며 “고향에 돌아가도 르투르바이 주말을
통해 위기 부부들을 돕고 싶다”고 덧붙였다

2020-09-03T11:41:08+09:002020/09/02|골롬반 소식, 보도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