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관리자등록일: 2012-06-07 09:34:30 조회 수: ‘6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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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천교구 원로사목자 임홍지 신부가 공 토마스 신부 묘 앞에서 기도를 바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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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22일 춘천교구 죽림동 주교좌성당 성직자묘역 춘천교구 원로사목자 임홍지 신부가 한 묘비 앞에 서서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모자를 벗고 묘 앞에 무릎을 끓었다. 그 모습 자체로도 울림이 큰데···. 노 사제의 목소리 마저 떨린다. “···신부님! 하늘나라에서 행복하시지요? 신부님께서는 당신의 모든 것을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내놓으셨습니다. 평생 헌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 보고싶습니다. 하늘나라에서도 저희를 위해 기도해주십시오.”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기도를 마친 임 신부가 추억이 떠오르는 듯 묘비를 한참동안 매만졌다. 십자가를 품은 검은색 묘비에는 ‘공 토마스 신부’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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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 토마스 신부(1919~2009)는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소속으로 1948년 1월 한국에 온 이후 삶의 전부를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바쳤다. 그리고 61년 간의 한국생활을 뒤로하고 2009년 2월 19일, 그 영혼도 한국 땅에 묻었다. 춘천교구 신부, 수도자, 신자들은 공 토마스 신부를 ‘성인 사제’로 기억한다. 신학생 시절(1965~1968) 공 토마스 신부를 곁에서 지켜봤던 임홍지 신부는 “공 신부님께서는 화낸 일이 단 한번도 없을 정도로 온화하시고 사랑이 많은 분이셨다”며 “늘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과 함께한 참 사제셨다”고 회고했다. 외국인 선교사들에게는 늘 그렇듯, 아일랜드 출신인 공 토마스 신부에게도 한국은 낯선 곳이었다. 피부색, 언어, 음식, 문화 등 맞는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었지만 그는 늘 한국과 한국인에 맞춰 살아갔다. 그럼에도 그는 종종 한국 문화를 몰라 어려움을 겪곤 했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공 토마스 신부가 공소를 찾았는데 신자들이 좋은 음식을 대접해주겠다며 찰떡을 내놓았다. 그런데 외국인인 공 토마스 신부가 떡을 먹는 방법을 몰라 젓가락으로 찰떡을 둘둘 말아 한 번에 입에 넣고 말았다. 그러자 입에 들어간 찰떡이 공 토마스 신부의 기도를 막아 숨이 막혔다. 큰일 날 뻔 했던 사건이었다. 신자들이 주는 음식은 기꺼이 다 먹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생긴 일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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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 토마스 신부는 취미가 ‘공소 신자 방문하기’였을 정도로 선교에 열성적이었다. 시간만 나면 버스를 타거나 걸어서 공소에 있는 신자들을 찾아 나서곤 했다. 그래서 강원도 지리를 한국인보다 더 잘 알고 있었다. 공 신부는 한 번 본 신자는 잊지 않을 정도로 신자 한명 한명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길을 가다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주치더라도 모르는 신자가 없을 정도였다. 이름은 물론이고 세례명, 가족사항, 가정형편까지 모르는 것이 없었다. 주변 사람들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는 늘 메모하는 습관이 있었다. 종이가 없을 때에는 손바닥에 메모하기도 했다. 늘 한국인들이 먼저였다. 자신은 낡은 코트 하나로 겨울을 지냈고, 속옷도 낡아 매번 기워 입어야 했지만 구호물품이 들어오면 가난한 한국인들부터 챙겼다. 너무 가난해 아이를 해외 입양시켜야 할 처지에 있는 가정이 생기자 그는 돈을 모아 그 가정을 도왔다. 입양갈 뻔 했던 그 아이는 지금 사제로 살아가고 있다. 돈이 없어 치료를 받지 못하는 이들이 있으면 춘천시에 있는 성골롬반의원에 추천서를 써줘 무료로 치료받게 해준 것도 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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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골롬반의 집 노인요양원에서 공 토마스 신부를 돌봤 던 노라 수녀(성골롬반외방선교수녀회)는 “공 토마스 신부님은 요양원에서 지내시며 평생 사랑한 한국 신자 들을 많이 그리워하셨다”고 말했다. | 평생 한국에서 신교 열정을 쏟은 공 토마스 신부는 노년에 약 20년 넘게 파킨슨병을 앓았다. 병마와 싸우면서도 그는 2002년 은퇴 후 공소에서 사목활동을 이어갔다. 하지만 그의 선교 열정과는 달리 갈수록 병이 악화되자 할 수 없이 공소를 떠나 성골롬반외방선교회 한국지부에서 생활해야했다. 그리고 거동이 불편해진 2008년부터는 춘천에 있는 성골롬반의 집 노인요양원에서 지냈다. 세 평 정도 되는 병실에서 홀로 지냈다. 마음은 늘 한국 신자들과 함께였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평생 한국 신자들과 대화하기를 즐긴 그는 늘 사람을 그리워했다. 공 토마스 신부는 죽기 전에 꼭 하고 싶었던 일이 있었다. 61년 동안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헌신한 그는 마지막 인생을 몽골 선교를 위해 바치고 싶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몽골선교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2009년 2월 19일 오전 7시 25분, 향년 90세였다. 그는 은퇴 후에도 고국인 아일랜드로 돌아가지 않았다. 한국에서 죽고 한국에 묻히길 원했다. 그의 유품은 성경책과 묵주, 책, 교회신문과 잡지가 전부였다.
글_권선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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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 토마스 신부 약력
1919. 10. 31. 1943. 12. 21. 1948. 2 ~ 1949. 9 1949. 9 ~ 1950. 6 1951. 8 ~ 1958. 6 1958. 9 ~ 1961. 10 1963. 1 ~ 1965. 5 1965. 5 ~ 1969. 2 1970. 3 ~ 1974. 4 1975. 1 ~ 1979. 4 1980. 3 ~ 1981. 8 1984. 5 ~ 1958. 9 1985. 9 ~ 1988. 7 1989. 1 ~ 1993. 10 1994 ~ 1998 2002. 1. 2009.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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