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매 제랄드(Gerard Marinan) 신부 / 번역과 해설: 민 디오니시오 신부
이른 아침, 기차가 부산역을 출발하였다. 밤새 폭우가 쏟아지더니 날이 밝을 때까지 빗방울이 뒤따라왔다. 차창 밖에 펼쳐진 척박한 땅을 보며 비참한 마음이 들었다. 시골은 너무나 가난하고, 초가지붕을 얹은 흙집이 언덕 위에 위태롭게 모여 있었다. 집들이 옹기종기 붙어 있어 신기했다. 흰색 옷을 입은 사람들이 보이고, 주일인데도 밭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이곳이, 한국이구나!" 똑같은 풍경이 계속되자 졸음이 몰려왔다. 얼마쯤 갔을까. 우리가 대구에 도착했음을 알리는 목소리가 잠을 깨웠다.
플랫폼에 서 있는데, 한국 사람들이 희귀 표본을 관찰하는 과학자처럼 우리를 쳐다보았다.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만 우리 또한 그렇게 그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긴 수염을 가진 프랑스 신부 두 명이 두 팔 벌려 다가와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우리는 택시 두 대에 나누어 타고 숙소인 대신학교로 향했다. 시내 상점들에 시선을 빼앗겨 일행이 탄 다른 차와 멀어지는 줄도 몰랐다. 골목길로 들어간 택시는 이층집 앞에 멈추어 섰다.
그런데 그 집은 아무리 봐도 10명의 신부들이 다 같이 살기에는 너무 작았다. 실망하여 머뭇머뭇하는데 택시 기사가 빨리 내리라는 듯 소리쳤다. 우리는 아직 도착하지 않은 일행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안에 들어가 있기로 했다. "여러분은 누구십니까?" 그 집에 있던 사람이 라틴 말로 물었다. 당황한 우리는 "그럼 당신은 누구십니까?"하고 질문했다. 그곳은 성공회 신부들의 집이었고 우리는 잘못 내렸던 것이다. 길을 잃었지만 친절한 성공회 신부 덕분에 우리는 신학교에 도착할 수 있었다.
프랑스 신부들과 한국 신부들의 환영을 받았고 15분 후에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가 찾아왔다. 따뜻하면서 활력이 넘치고 지혜가 뛰어난 분이었다. 아, 집에 도착했다. 동쪽을 향한 우리의 긴 여행이 끝났다!
우리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주는 교수는 수업 30분 전에 교실에 들어온다. 그래서 그를 관찰할 시간이 많았다. 예의 바른 한국인들은 방에 들어가기 전에 신발을 벗고 들어가기 때문에 우리는 선생님의 양말도 볼 수 있는데 자전거를 탈 때 바짓단을 옆으로 묶었을 때 모습과 비슷했다. 그가 입은 하얀색 옷깃 달린 코트는 발목을 제외한 모든 부분을 감출 만큼 길었다. 그의 밝은 얼굴과 짙은 갈색 눈에는 유머와 지혜가 담겨 있었다.
한국말을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치통이 심해져서 치과를 소개받아 혼자 찾아갔다. 의사는 만화에 나오는 쥐 사냥꾼 같은 목소리로 충치가 있으니 신경을 죽여야 한다고 말했다. 치료를 받는 동안 '이 의사가 내 몸의 모든 신경을 죽이는구나!' 생각했다.
치료를 마치고 나와서 몽롱한 상태로 약 25분 동안 걸었던 모양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길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그때 내 앞에 거지 한 사람이 무얼 좀 달라는 듯 손을 내밀었다. 문득 그에게 일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 사람의 도움으로 다시 치과에 갈 수 있다면 왔던 길로 되돌아가면 되겠다 싶었다. 나는 얼굴이 벌게지도록 내 앞니를 잡고 뽑는 시늉을 했는데, 그가 알아듣고 길 안내를 시작하였다. 그리고 치과에 도착했다. 그렇다. 치과에 도착했다. 내가 찾던 그 치과는 아니었지만!
대구에 치과가 하나만 있을 리 없을 텐데… 나는 그를 탓할 수 없었다. 이제 대구에서 단 한 군데만 있는 곳을 떠올려야 했다. 그래, 대구역! 나는 그를 보고 '칙칙폭폭' 기차 소리를 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가 알아듣지 못했다. 하는 수 없이 수고비를 건네고, 이제는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다고 하며 그와 헤어졌다.
그러나, 그와 헤어졌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었다. 자신의 임무에 충실한 그 사나이는 다시 나를 따라왔다. 성가시기도 했고 이제는 그와 할 수 있는 게 없어서 미안했다. 나는 여기저기 물어보다가 내가 원하는 것을 이해한 한 남자를 만났다. 여전히 나를 따라오는 거지에게 그 남자는 기차역 가는 길을 설명해 주었다. 거지는 나를 데리고 미로 같은 골목길로 한참을 걸어갔고, 마침내 대구역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그에게 감사 인사를 한 다음 등을 돌려 신학교 가는 길로 발걸음을 떼었다. 하지만 정직한 거지는 나를 역 바로 앞까지 데려가려고 했다. 포기를 몰랐고 몸짓과 표정은 너무나 간절했다. 최선을 다해 나를 도왔으나 결국 내가 따라가지 않자 그는 슬픈 표정으로 돌아섰다. 그 가난한 사람이 안타까웠지만 서둘러 돌아와야 했다.
한국말도 모르면서 혼자 치과에 갔던 어리석은 행동을 반성하였다. 길에서 시간을 낭비한 것 같았지만, 참 소중한 경험이 되었다. 우리는 이곳 대구에서 드망즈 주교의 배려와 깊은 환대를 받으며 지내고 있다. 프랑스 신부들과 한국 신부들도 우리가 편안하게 지낼 수 있도록 있는 힘을 다하여 도와준다. 우리는 대구를 좋아한다. 이곳을 떠나게 될 때 행복한 추억을 가지고 가게 될 것이다.

매 제랄드 신부의 20대 시절 ⓒ성골롬반외방선교회

60대의 매 제랄드 신부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의 카메라에 담긴 한국인의 모습 ⓒ성골롬반외방선교회

선교사들의 카메라에 담긴 마을 풍경 ⓒ성골롬반외방선교회

한국에 첫 번째로 파견된 골롬반 선교사들 10명과 당시 대구대목구장 드망즈 주교(앞줄 가운데)가 대구 계산성당 성모당 앞에서 한국 도착 기념 촬영을 했을 때. 뒷줄 왼쪽에서 세 번째가 필자 매 제랄드 신부이다. 1933년 10월. ⓒ성골롬반외방선교회
해설: 민 디오니시오 신부

한국지부 아카이브 담당 민 디오니시오 신부 ⓒ성골롬반외방선교회
매 제랄드 신부님은 1933년 10월 29일, 한국으로 파견된 첫 번째 선교사 10명 중 한 명입니다. 처음에 중국으로 파견된 이들은 상해에 도착했지만, 배에서 내리지 못했습니다. 한국으로 가라는 연락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아일랜드에서 1934년 8월에 발행한 골롬반회 선교잡지『파이스트Far East』에 실렸습니다. 서양인 선교사의 눈으로 본 1930년대 한국의 모습이 잘 담긴 글입니다. 한국의 모든 것이 신기하기도 했을 것이고, 가난했던 사람들을 보며 마음 아팠을 겁니다. 당시 아일랜드 역시 가난했기에 동병상련을 느꼈을 것입니다. 두루마기를 입은 한국어 선생님에 대한 묘사도 재미있고, 길 잃은 이야기에서는 한국어를 못해 답답했던 저의 초창기 한국 생활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저는 1974년 휴가 때 아일랜드에 가서 매 제랄드 신부님을 만났는데, 저에게 한국에 대해 많이 물어보셨습니다. 저뿐 아니라 한국에서 활동하는 신부님들이 아일랜드에 가면, 관심을 가지고 꼭 물어보셨다고 합니다.
매 신부님은 아일랜드의 신학교에서 일하셨을 때 한국으로 발령받은 선교사들에게 한국말을 가르치셨습니다. 하지만, 그때 배웠던 분들이 막상 한국에 오니까 사람들이 발음을 잘못 배웠다며 새로 배워야겠다고 말해서 웃은 적이 있습니다. 매 신부님은 비록 한국어 발음이 정확하지 않았지만, 한국에 대한 애정이 큰 분이었습니다. 매 제랄드 신부님은 85세 때인 1993년에 선종하셨는데, 젊은 나이에 돌아가신 다른 첫 선교사들보다 장수하셨습니다. 유머 있고 글도 잘 쓰시고 마음이 따뜻한 좋은 신부님이셨습니다. 저녁 시간, 신부들이 모여 담소하는 자리에 찾아오셔서 맥주 한잔하고 가셨던 모습이 생각납니다.